파리하다

-파쇄하는 일 분 일 초

by 시인 이문숙

어떤 급강하에도 우리는 '시'를 놓지 않아. 채터턴이 마지막 오른손에 쥐고 있던 두루말이 종이를. 그 아래 갈기갈기 파쇄한 원고 상자를.


의자도 없는 작고 좁은 테이블에 서서 촛똥이 갈매기 새똥처럼 끼룩끼룩 시간을 부식하고 사유화하는 그곳에서 피를 찍어 시를. 아니 갈색 병에 담긴 비소를 찍어 목숨을.


책이 금지된 나라가 있어. 책이 타기 시작하는 최초의 온도 화씨 451의. 그런 내놓으라 하는 분서갱유가 있어. 17살의 채터턴은 스스로를 종이무덤 속에 매장하면서도 그가 태어나기 세 달 전 세상을 떠난 음악가 아버지의 아름다운 악보를 놓지 않으려 했겠지.


그런 분서와 갱유의 불구덩이 속에서도 장미는 피어나네. 가시는 뾰족해지네. 장미가 발화하는 온도는 사랑의 온도를 미세하게 초과하는 37.3일까.


마지막 순간에도 채터턴의 왼손은 심장의 마지막 박동을 들었겠지. 그걸 오른손에 쥔 종이에 기록하려고. 창턱엔 한 송이 장미. 반만 열린 저 덧창 격자 너머로 사람들의 지붕이 보이고. 안간힘으로 붉게 피어났지만 이 그림 속에서는 장미의 청색증. 오로지장미의 호흡곤란. 심정지.


이 장미를 희망과 낙관의 전조라 말하긴 싫어. 빨강과 파랑의 대비가 섬뜩하게 아름답다고 닥달하긴 싫어.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백석의 ‘선우사’


채터턴이 누운 밀짚침대가 정하고 맑은 흰가재미가 누워있는 밀짚불 받쳐논 나조반 같다. 지금은 쓸쓸한 저녁 어스름 같기도 동트는 해정한 새벽 같기도 하다.


그럼 채터턴은 뭐하는 자요? 그는 부진아였고 다락방성애자였으며 시 요물이었으며 천재 시인이었다. 10살부터 시를 썼고 17살에 요절했다. 갔다.


채터턴은 뱅크시와 같이 브리스틀에서 태을 묻은 18세기 가난뱅이외톨이생계파탄자이다.


같은 창작의 악몽을 채터턴은 남루한 다락방에 수도사 토마스 롤리라는 가명으로 시를 썼고 곤궁했다. 뱅크시는 낡고 비루한 담벽에 진주 귀고리 대신 화재 경보기를 달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뷰가 나쁜 ‘월드오프 호텔walled off hotel’를 세웠고 자본을 조롱했다.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백석의 ‘선우사’


런던의 해정한 안개 속에서 허우적대던 17살 채터턴은 결국 비소를 마셨다. 다락방의 격자 너머로 세상은 무한하였지만 그는 떠났다. 수많은 원고를 발기발기 파쇄한 뒤. 그로부터 4세기가 지난 2018년 경매에서 뱅크시의 ‘소녀와 풍선’은 낙찰된 뒤 파쇄되었다. 자본의 우상 파괴였다. 자본이라는 방독면을 쓴 호흡곤란의 천사들이 파쇄된 종이 위를 선회했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백석의 ‘선우사’


파리했다. 정갈해서 파리했다. 생선 벗, 선우膳友. 선량하고 하얀 벗 가재미 채팅턴.


이렇게 하루의 일출이 파쇄되고 일몰이 오는 저녁에는 자꾸 격자창을 열게 된다. 청색증으로 물들어가는 천공에 채터턴의 새빨간 장미 한 분을 보려고.


아니다. 흰 잔설 사이로 산수유 나무에 매달린 적색경보 같은 빨간 열매를 보려고. 현시하려고.


그 나무 아래 17살 노견 루키를 산책시키는 80세 할머니는 늘 화단을 가꾸는 모종삽을 갖고 다닌다. 루키가 변을 보면 산책로 화단의 꽝꽝한 툰드라 같은 흙을 파고 묻으려고.


이런 풍경이 파리하고 해정하다. 찡하고 끙끙대도록 두려워 세괃은 가시 하나 없다. 뼈를 발라내면 고스란히 하얀 살을 현시하는 밀짚불이 비쳐내는 나조반 같다. 사기나 유리로 만든 접시 하나 가지지 못한 이 저녁.


채터턴은 뱅크시는 그 하얀 백내장의 저녁이면 허정허정 세상을 보는 통창 속에 이 저녁의 그림을 걸어준다. 뱅크시가 밧줄에 대롱대는 탈옥수의 타자기를 왜 그 벽면에 그렸는지 그 이유를 물을 수 없는 것처럼.


아니 왜 배변봉투 없이 모종삽은 왜 들고다니냐고 따져 물을 수 없는 그 길의 여자처럼. 변을 화단에 묻으면 그게 독해서 남천나무가 잎을 먼저 떨어뜨리고 흰 옥잠화 입술이 파리해진다는 말을 차마 못하는 그 길 위의.


* Henry Wallias, Chatterton

#백석시인#뱅크시#브리스틀#채터턴#테이트브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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