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니?

-스루, 스르르

by 시인 이문숙

호수가 다 녹았어요. 물 속을 들여다 보아요. 붉은 태아의 얼굴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어요. 잠자는 아기 얼굴 같은 수련 잎 말이어요.


얼었던 호수가 녹아 물 속을 드라이브 스루through할 수 있으니 참 좋다고 모르는 사람에게 외쳤어요. 스루, 스르르, ‘went through.’ 혹독한 겨울을 잘 건너왔다, 그렇지 않니.


아직도 공원 관리소 직원이 떼내지 못한 현수막, ‘얼어붙은 호수에 들어가지 마시오, 위험’은 철지난 바닷가 빛바랜 파라솔처럼 펼쳐져 있구요. 잉어가 조상이라고 믿는 그는 이상하게 물을 무서워하구요.

당신, 잉어가 조상이라면서 왜 물을 두려워해요?


아쿠아리움 직원복을 입은 남녀가 잉어들을 보며 얘기하는 걸 엿들었어요. 양식으로 키운 비단잉어가 산란한 알에 자연의 호수에서 살던 잉어가 수정을 하면 가장 사람 얼굴을 닮은 ‘인면어’가 탄생한다고요. 인면어라구요?


호수의 미간에 어느덧 물살이 찰랑찰랑한 게 물이 무서워 당신의 조금 찌푸린 얼굴 같아요. 언제 여기에 오셔서 이렇게 매혹적인 얼굴, 인면어의 전각을 남기셨나요. 똑떨어지게 정확한 눈, 코, 입. 올해는 수양버들이 현실에 없는 청와에 옥난간을 두른 듯 으리으리해요. 물이 당신의 고향이라면서요?


그러고 보니 물은 어디에 모여있든 다 현자 같아요. 어디서든 들여다 보는 이의 얼굴을 조형해 놓고 달아나 버려요.


호수를 들여다 보다가 문득 그 연못이 생각났어요. 합정동 어느 학교 본관으로 들어가는 길 옆에 작은 연못 말이예요. 학생들이 혹시 빠져 사고가 날까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가 뺑 둘러 있었구요.


점심 시간을 알리는 엘리제가 ‘미레미레미시레도라’ 하면 복도에 배식 차를 다 옮겨놓은 알바생들이 그곳에 모여 게임을 하던 연못. 여름에는 깊이 모르는 물, 초겨울에는 살얼음.


가위바위보를 하고 지는 사람이 그 연못에 한 발씩 들여놓는 처음 보는 그들만의 점심 시간 보내기 게임. 천 명 학생들의 점심 상을 차려주고 휴식 공간 하나 없는 그들이 벤치에서 까무룩 졸다 일어나 반복하는 어쩌면 생존 게임 같은 것.


그들이 입은 희지만은 않은 가운에는 빨간 음식 얼룩 같은 게 그 학교 본관 조회대 옆 만첩홍도처럼 피어있구요.


지켜보는 이는 가슴이 콩닥콩닥하구요. 다행히도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를 신고 있었지만요. 꿀렁한 뻘흙 같은 게 가득할 것 같은 연못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었구요. 깊은 곳까지 한 발이 빠지면 그들도 사색이 되어 연못 밖으로 뛰어나왔지만요.


긴 장화의 얼굴이 그 연못 물 속에도 담겨 있어요. 그 알바생들의 아슬한 놀이를 지켜보며 노란 탱자는 가시를 더욱 키웠어요.


다시 엘리제가 점심 시간을 마치는 종을 울리면, 다시 배식차를 급식실로 끌어다 놔야 해서 그 깔끔하지만은 않은 위생복의 만첩홍도 얼룩꽃 옆에 연못에서 튄 진흙얼룩으로 구불구불한 등걸을 그렸지요.


당신이 그 연못에 살던 잉어였다면 장화라는 걸 모르는 긴 어떤 물체가 그곳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면 얼마나 더 무서웠을까요. 저게 급식소 같은 곳에서 물일 할 때 가장 요긴하게 쓰는 장화라는 걸 모르는 잉어였다면?


‘착하니 사람이다’, 급훈이 교실에 걸려 있구요. 칠판 위 표어 속에는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빅브라더 선글라스 낀 담임 사진이 붙어 있구요. 수시로 순찰대처럼 순시하는 연탄가스 교장이 있구요.


급식 알바생의 고마운 장화 말고 연탄가스처럼 중독성 강한 처세술, 성공, 승리, 치유, 으리으리하게 내노라한 희망 부추키는 교과서나 참고서는 저 연못엔 없었어요. 무조건 연못으로 밀어넣는 저 아슬아슬한 게임을 연못 속 비단잉어두 싫어하는 게 분명했구요.


되려 저 연못에 들어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팡질팡 고민과 긴장이 묻어있는 책 같은 걸 아마도 연못은 영구 소장본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물 속 잉어님은 아세요? 옛날엔 다들 죽기 전 문집 남기는 게 소망이었다 하지요. 그게 화첩이든 일기든 일상을 소묘하는 거요. 이를테면 ‘사제첩' 같은 사생집 말이예요.


사제麝臍는 사향노루의 배꼽. 매일 향기나는 족적 남기기는 물에서든 따에서든 다 유효하지요. 이것이야말로 뻔뻔하지 않은 자기 사용 설명서 같아요. 해맑은 어제와 오늘의 모르는 미래의 이두박근들이어요.


오늘은 이 물가에 오기 전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옆의 소녀가 남기고 간 엄청 많은 지우개똥을 한 알 한알 공들여 치우고 나서 들여다보는 호수 물이어요.


무릎이 있어 물 앞에 쪼그리고 앉을 수 있어 고마워요. 모두가 텅빈 공백 ( )의 1이 되는 비 오기 직전, 오늘 내 속에 피어난 아마릴리스는 붉은 심장을 닮았고요. 물 속 잉어는 빼춤하니 사람 얼굴을 닮았어요. 진흙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수련은 태아의 붉은 얼굴을 닮았어요


그 시절 천 명의 점심 밥상을 차려준 알바생들을 생각하니 오늘도 나를 잘 사용해야 될 것 같아요. 물 위에서 벌어지는 어둠과 빛의 혼약 그리고 지극히 맑은 청빈을 다시 다짐하면서 옆을 보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잉어가 조상이라는 그가 서 있었어요. 아니 잉어가 된 그가 서 있었어요. 직립한 물고기로요.


살랑 지느러미를 흔들 때마다 얼룩덜룩 말버즘방울나무가 짤랑 흔들리며 혼탁해지려는 나에게 각성을 주는 소리가 나요. 엘리제가 울려요. 저에게 말(언어)의 까슬한 버즘이 얼룩덜룩 피여나면 저는 사슴이 되려나요. 그는 잉어가 되고 저는 사향사슴의 배꼽이 되려나요.?


그 새끼 소녀 사슴의 별명은 키키kiki, 미국 엄마 실라Sheila가 지어준 이름, 덧니 예쁜 소녀가 키키 웃는 듯한 소리. 실라의 엄마는 선희구요. 미군 장병 남편과 헤어지고 그 낯선 땅에서 억척으로 농장 일하며 실라를 키웠대요. 고향이 그리워서 딸 이름을 왕조 신라와 가장 유사한 ‘실라’로 했구요. 매 분 매 초 실라, 실라 부르며 일했대요.


도서관의 소녀가 남겨준 지우개똥 같은 햇살이 부서지구요. 비껴 열린 물의 문 뒤 그녀는 물이 그린 얼굴 속에서 뭐하나요. 도서관에서 공부보다 머리 빗고 손거울 보는 앞자리 여학생 지우개똥 물방개 헤치고 물의 책 하나가 펼쳐져 있어요.


영문도 모르고 고등학교 시절, 국어 샘이 빌려준 백석의 '사슴' 복사본이 너덜겅 떠있어요. 이유는 모르는데 빌려 줘서 읽었던 그 시집 말이예요.


88년 해금도 되기 전 훨씬 전 70년대 중반인데요. 월북한 시인 백석. 무척 위험한 읽기였을 터인데, 고등학생인 저에게 백석을 왜 빌려줬을까요?


골작에는 흔히

流星(유성)이 묻힌다.


黃昏(황혼)에

누뤼가 소란히 싸히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 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山(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백석, 九城洞(구성동)


고마워요.이 이상한 나날에 다시 읽어볼게요. 피나 바우쉬처럼 소경이 되어 눈 감고 카페의 의자 옮기고 쓰러뜨리는 이상한 춤 따라하면서요. 그 카페 이름 뭐죠? 몰라, 뮬러? 뮐러?


싱크홀이 상처처럼 벌어지는 곧 무너지기 직전 언덕에서 추는 ‘봄의 제전’이라는 춤. 지우개똥 소녀가 추고 알 수 없는 먼곳에서 ‘누뤼’가 추고 실라 엄마 선희가 토마토 심으며 추고 연못의 살얼음이 우찌근 벌어지며 추는.


기이한 손 동작에서 짐승의 뾰족한 뿔이 지우개똥 움이 치아 교정기도 무력한 소녀의 덧니가 제전처럼 찬란한 한 시대의 풍미처럼 왕조처럼 올라오는 듯해요. 스루, 스르르.


*르네 마그리트, 진리의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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