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벨 수국

-갈망하는 물그릇

by 시인 이문숙

애나벨, 내 사랑. 애나벨, 바닷가 지하매장소. 애나벨, 물빛 나라. 애나벨, 갈 수 없는 장소.


애나벨, 불특정자. 애나벨, 익명 아파트. 애나벨, 지하기계실. 애나벨, 타락천사. 애나벨, 보수 영선반. 애나벨, 기계톱.


아파트 애나벨 수국, 두부처럼 조용하고 부드럽게 허공에 응결한. 9품천사 중에서 가장 높은 *치품천사seraph도 질투한. 불꽃의 단검 플라벨룸Flabellum을 들고 있는. 뱀serpent의 유혹이며 동시에 지혜의 전달자.


어느날 갑자기 뭉게뭉게 그러나 무참히 전지된. 전지된 15개 가지는 어디로 갔을까?


애나벨, 차가운 북풍. 애나벨, 전지가위. 애나벨, 누가 베어버렸을까. 눈감은 뭇별들의 눈동자. 달빛도 꺼진 꿈. 천 개 마을의 꿈. 꿈의 정전. 불시의 오작동.


I and my Annabel Lee;

With a love that the winged seraphs of heaven

Coveted her and me.

나, 나의 애너벨 리

천상의 천사조차도 탐낸

– Edgar Allan Poe, Annabel Lee


아파트에 수상한 소문이 돈다. 애나벨을 애나벨 수국을 누군가 베어버렸다. 그전엔 ‘이 애나벨 수국은 천개의 마을 꿈’ 프로젝트로 심은 것입니다’라는 팻말이 뽑혔다. 마을에 불이 소등됐다. 누가 그랬나요. 이 가여운 것을. 이제 피기 시작한 애나벨을, 그 어린 사랑을.


The angels, not half so happy in Heaven,

Went envying her and me-

우리의 반만큼도 행복치 못한

그 천사들의 질투

– Edgar Allan Poe, Annabel Lee


애나벨 수국을 심고 가꾸던 사람들이 분노했다. cctv를 보고 화단 앞 주차된 차들의 블랙박스를 보려했다. 단서가 없었다. 경찰이 출동했다.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feel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나의 애너벨 리 빛나는 눈동자

별들은 눈 감고

– Edgar Allan Poe, Annabel Lee


아파트 출입금지 지하 공간을 가본 적 있다. 배관공사 시찰, 주민 견학으로. 지하 기계실. 우리의 주거지 아래 이런 곳이 있다니. 어두컴컴한 카타콤베.


천장에 흘러가는 무수한 배관들. 알 수 없는 장치들. 끊임없는 기계음과 뚝뚝 떨어지는 녹물. 썩는 하수구 냄새. 열수송탱크와 감압밸브들. 비인간적이고 반생물적인 기계들의 처소. 그곳을 지키는 음울한 작업복의 얼굴들.


영선반 직원이 실토했다. 그날 아카시아를 전지했다. 옆의 것도 잡목인 줄 알고 베었다. 잡목잡목잡목. 나는 귀를 막았다.


차라리 그 지하공간에 벤 가지를 꽂아두었으면. 생수병 속에 미의 고귀한 친족highborn kinsmen으로 그곳 암울한 곳을 비췄으면.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ounding sea.

바닷가 돌무덤 울부짖는 바닷가 그녀 무덤 곁에.

– Edgar Allan Poe, Annabel Lee


나는 새벽에 일어나 그 끊긴 가지를 찾으러 나갔다. 7동 뒤 전지한 나무 적재장. 단풍의 물갈퀴 잎. 백송 가지. 란형 엽맥 물꿩나무 가지. 아니다. 아니다. 잘린 아카시아 가지도 없다. 애나벨, 현명하고 견고한 나의 애나벨.


다시 애나벨에게 달려갔다. 네 분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니.


잘린 아카시아는 시든 채 음식물 수거통 뒤 영산홍 발 아래 던져져 있었다. 그러나 애나벨은 없었다. 다시 화단을 샅샅이 훑는다. 경비원들이 낙엽쓰레기를 모아두는 마대. 1동 앞 사철나무 아래 마대에 숨어있는 거니.


마대를 열었다. 일체 없다. 애나벨, 그 맺힌 꽃과 가지는 어디로 갔을까. 차라리 기계실 그 열악한 환경에 영선반 직원이 ‘아, 이런 생활 너무 끔찍해’할 때, 천사도 질투한 사랑으로 반짝 켜졌으면. 어떤 버려진 생수통에서 꽂혀 살다가 실뿌리 내리고 애숭이꽃들이 놓친 뿌리에 가지에 물그릇으로 ‘항복 없이’ 맺혔으면.


That the wind came out of the cloud by night,

Chilling and killing my Annabel Lee.

밤 구름 바람에 애나벨 싸늘하게

– Edgar Allan Poe, Annabel Lee


그렇다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실수로 잡목인 줄 알고 잘랐다는 건 믿지 않아도. 그냥 너무 탐나서 이곳에 꽂으려고 실수인 듯 위장했어요.


애나벨, 여기 혼자 아니 여기 지하생활자 직원들과 같이 두고두고 보고 싶어서요. 경배하고 싶어서요.


기계작동음에 난청이 되고 누수된 물 썩는 시궁창 냄새에 후각마비가 왔어요. 답답한 공기에 폐색증이 생기고 색약이 되어가요. ‘순수와 변덕’이 교차해요. 통제 안 되는 ‘고결과 타락’이.


이걸 잠시라도 잊을까 해서요. 차라리 그 잘린 가지에 물그릇 꽃들이 그곳에서 ‘최첨단’으로 발화했으면.


병 속에서 물꽂이가 잘되어가요. 매일 깨끗한 물로 갈아주거든요. 뿌리도 내려요. 여기서 잘 자라서 다시 제자리에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때요. 삽목이 잘 될 것 같지 않아요. 애나벨, 이 어린 신부와 이 부단한 삶에 더 잘 활착하고 싶어요.


아,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지하공간에 배관이 흐르고 기계가 지저귀고. 이런 곳에 당신들이 이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노동으로 분출할 때.


우리가 바로바로 온수를 쓰는 이유. 난방 공급을 제때 받는 이유. 모든 사물들의 ‘오작동’을 그들 손과 눈과 분주한 발. 그 집중과 서성거림이 있어 내가 안온히 사는 이유. 당신들이 애나벨을 보고 사랑스럽다 느낄 수 있다면요. 다 용서가.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my darling-my life and my bride,

밤물결 밀어올때

내 사랑, 내 사랑, 내 생명

나의 신부여

나는 곁에 눕는다.

– Edgar Allan Poe, Annabel Lee


벤 아카시아는 있었다. 그러나 잘린 애나벨은 어디에도 없었다. 끝끝내. 애나벨, 천 개 마을의 꿈. 애나벨, 황폐한 녹소토의 전언.


지하공간은 입주민이 절대 가면 안 되는 곳. 불가지의 장소. 가서 확인할 수 없었다. 불특정자 우리는. 나의 확연한 절망 앞에서 우리의 절반도 행복하지 못한 치품천사가 날개를 파닥였다.


열 사흘 불면에 전지되었다. 열 나흘 공황에 강전정되었다. 온몸이 불타올랐다. 숨쉴 때마다 애나벨 잘린 가지들이 쏟아졌다. 꿈의 묘혈.


애나벨, 잘린 가지. 지하 매장소. 빛도 안 드는 카타콤콤베. 그곳의 은수자가 되었다. 하계천사가 되었다. 그때 새순이 났다. 한 가지 돋았다. 두 가지로 분화했다. 분화와 재생. 천국에서도 반쯤 불행한 치품천사보다 지상의 귀속.


애나벨, 날개를 거부한 9품천사. 아니, ‘고결과 미덕’을 전하는 5품의. 아니 모든 계급을 초과한 우리들의 호흡.


잘려서 불행했고 슬펐지만, 애나벨, 더 풍요와 불의 대전차와 다산. 더 많은 갈망의 물그릇들. 들끓는 머리맡에 놓일 것이다. 애나벨, 내 사랑. 나의 면밀한 신부.


*치품천사의 치熾는 기운과 세력이 왕성할 치, 불 활활 타오르다의 뜻이다. 火불 화, 戠찰흙 치의 결합이다. 불과 흙. 천상과 지상.


*누군가 몰래 전지한 에나벨이 3년 후 이렇게 컸다. 더 컸다. 손목건초염에 삐꺽대면서 물 주러 간다.


*폴 세잔Paul Cezanne, 수국Horten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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