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댐수퍼가 있는
나에 대한 느닷없는 적대감, 이걸 그냥 자의적으로 지금부터 ‘푸올란카’라고 일컫겠다. 이 푸올란카를 급격하게 삼키기 시작하면 불면의 꼭두부터 나온다. 다른 걸 삼키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푸올란카’, 비관주의 마을. 푸올란카, 다 떠난 마을. 영구동토에 쌓인 눈의 백색공포와 눈동자를 찌를 듯한 침엽수가 식료품이고 보행보조기이며 오락인 마을. 젊고 돔바른 사람들이 떠난 뉴타운 아닌 노령의 마을. 푸올란카, 우리말로 하면 얼음골. 얼음골의 쭈뼛바람과 음울한 잣솔구름과 찡그린 자화상.
젊고 바른 사람들이었다
-조용우 ‘삼익뉴타운’
밤새 푸올란카를 삼키던 내 구강기관을 활용해 안녕 고슴도치. 안녕 무당벌레 해보았다. 새롭게 조성된 두루미 공원, 돌 조형물에게. 고슴도치는 푸올란카, 비관주의와는 먼 얼굴이다. 새곰새곰 초승달 눈썹 아래 웃는 뾰족입. 고슴도치는 가시를 삭발한 웃는 얼굴.
나는 그 고슴도치를 삼켰다. 그 옆의 구근도 삼켰다. 무당벌레 등, 아홉 개 다도해 섬 같은 점도 삼켰다. 편의점의 태비고양이도 진열대의 참치 마요삼각김밥도.
믿음교회 첨탑, 꼭두새벽부터 벤치에 앉은 할마시들 꽃무늬블라우스, 밤새 녹은 아이스크림. 환약 같은 개똥도 독성이 있다는 천남성 푸른 열매도 할머니들의 불면치료 특효험 햇마늘까기와 쪽파 다듬기. 자루에 담긴 호랑이콩 벗기기도. 경희참한약국 한약찌꺼기도. 그 찌꺼기가 기른 흰 작약도.
주말에는 밖으로 나가 함박스테이크와 삶은 감자를 사 먹었다
-조용우 ‘삼익뉴타운’
푸올란카, 4월에도 눈만 내린다는 마을. 이 웃는 돌고슴도치를 화물비행기에 실어 보낼까. 언제나 웃는 눈. 오는 눈이 사납고 웃는 눈이 살가워서 푸올란카, 그곳은 더 빛날 것이다.
우울한 보조보행기를 멈추고 돌고슴도치 웃는 눈에 쌓인 눈을 ‘울라브 하우게’처럼 털어줄 것이다. ‘다댐수퍼’에 가 빨래세제를 사고 감자를 사고 열대과일을 살 것이다. ‘다됨’의 표기 오류 ‘다댐’이 선사하는 즐거움으로 하루 한나절을 소진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푸올란카야말로 ‘삼익뉴타운.’
건조기가 조용히 돌아갔다
-조용우 ‘삼익뉴타운’
안녕, 고슴도치. 너는 할 일이 아주 많을 것 같아. 전혀 대리석 조각 같지 않아. 잘 웃어서 ‘낙상주의, 발빠짐주의’라는 말과는 멀고 사월의 가팔라진 계단과 어울리지 않아. 조용한 집에 푸올란카가 건조기에서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
베란다에는 죽은 화분이 모여 있다
타일 사이 물때 위로 빛은 고여
-조용우 ‘삼익뉴타운’
어느날 마스크를 벗으니 미소를 짓는 방법을 소실한 입술, 입꼬리. 깨끗한 타일 같은 윗니 여덟 개를 보이며 웃어볼까. 어떤 초등학교 여학생이 마스크를 벗으니 부끄럽지만, ‘좋은 부끄러움이었어요.’라고 하듯 말을 다물고 활짝. ‘다댐수퍼’의 진열장에는 가즈런한 푸올란카 비관주의 대신 ‘좋은 부끄러움’ 한 캔. 웃는 꽁치통조림 옆에 빨간 고추장튜브 곁에. 고운 먼지가 소복한 눈 같다고 약간은 투덜대며.
오래된 비바람을 보자
-조용우 ‘삼익뉴타운’
낡고 삭은 베란다 천장에 누런 비 얼룩이 있는 나의 푸올란카. 오래된 비바람이 배수관을 들락대며 가난의 빈빈한 노래를 들려주는 뉴타운.
털이 찐 늙은 개 보리
눈꼽을 떼어주고 착하다 착하다
-조용우 ‘삼익뉴타운’
손자가 기르던 금동이에요. 그 당시 얘를 사는데 금 한 동 값이어서 ‘금동이’라고 나는 불러요. 손자는 루킨지 럭키지 락킨지라고 하지만. 손자는 바쁘다고 금동이를 나한테 버렸어요. 금동이는 사람을 좋아하고 개를 무서워해요. 착하고 착해요. 그래서 내가 더 두려워요. 내가 먼 세상 가기 전 무지개 다리 건너야 할텐데.
착하다
한 번 더 써야겠다
-조용우 ‘삼익뉴타운’
가시 없는 돌 고슴도치야. 두루미공원의 없는 흰두루미야.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은 예쁜 숙녀 돌무당벌레야. 파꽃을 닮은 알리움 보랏빛 풍선꽃아.
새벽꼭두, 이 적대감의 진격을 비관주의의 침략을 염세주의의 방류를 나는 기여코 이것들과 대면하면서 벗어난다. 새벽부터 쪽파까기나 공원벤치에 모여 마늘까기 호랑이콩 벗기기. 동네양품점 말라죽어가는 화분을 살리기에 몰입하는 야위고 취약한 꼬부라진 이들을 보면서.
한약 찌꺼기 자루를 보행보조기에 싣고 한 발짝 쉬고 두발짝 쉬며 기여코 죽어가는 식물들을 살려놓는 이들의 작은 텃밭을. 이 착하고 고귀한 ‘비관주의’를.
푸올란카, 먼 비관주의의 고장. 그곳으로 이 고슴도치를 구름에 실어보낼게. 순록도 눈표범도 무섭지 않아. 붉은꼬리여우가 터뜨리는 악마의 불꽃춤도 기상이변도 두렵지 않아. 푸올란카, 그곳의 불고리 여우공원에도 이 ‘웃는’ 고슴도치의 조형물이 있니.
내가 사는 태영아파트에는 태영수퍼가 있다. 삼익뉴타운에는 삼익수퍼가 있다. ‘뜨근한두부읻슴’ 문구를 덧문에 붙인. 이 파올란카에는 ‘다댐수퍼’가 있다. ‘다댐.’ 아암, 다 되고 말고.
* 올라브 하우게 Olav H. Hauge 의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 빌헬름 함메르쇼이,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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