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량이라는 말

-바다에 튜바라는 악기

by 시인 이문숙

차도에 차가 없다. 위반하고 추돌하고 싶었다. 그래서 노란 중앙선을 밟고 걸어보았다. 이따금 오가는 차들이 위협하듯 경적을 울리다 제 풀에 져 나를 돌아갔다.


나는 청맹과니야 천치며 농아며 귀머거리야. 본래 차도도 인간의 길 아니었니. 추격할 테면 해 보아.


노란 중앙선, 금지와 금단의 선은 바다에 가서 돌문어나 먹물오징어나 되라지. 오늘은 재량휴일이야. 오늘 나에게도 재량이란 걸 부여하렴.


노란 중앙선을 밟으니 잃고 약탈되었던 먼 시야가 확보되니 좋아. 기뻐. 파동하고 고동쳐. 고층 스카이돔에 걸린 구름, 구름들.


나는 잠깐이지만 ‘달리고 지저귀는’ 기계들에 승리했다. 인간의 길을 잠시 확보하는 우쭐의 파라솔 아래 그 간이의자에 앉아 물방울 맺힌 구름의 음료을 마셨다. 플라스틱 컵이 우그러졌다.


우즈베키스탄인들이 모여 사는 지하 빌라 골목에는 이곳에 쓰레기 투기하면 ‘벌금 100만 원 부과’ 고지문이 중국단풍 가지마다 걸렸다. 셀로판지에 코팅된 그곳에 나는 그들이 간절히 보길 원하는 바다를 코팅해 걸어두었다. 가보지 못했으니 이걸 ‘세컨드핸드’ 바다라고 불러도 될까. 대체 휴일 같은 대체 바다.


시장에서 오래된 코트를 사 입었다

-조용우 세컨드핸드’


헌옷수거함에서 오래된 검은 코트가 격랑처럼 흘러내렸다. 우즈베키스탄에는 바다가 없어. 아직 내 나이에도 바다를 보지 못했다구. 경포 한 번 돈 벌어 가고 싶다. 돈은 벌면 뭐해. 가족한테 생활비 보내주고 나면 없어. 낯선 이국어에 섞여 우리말이 떠듬떠듬 점점 사라지고 있는 바닷말 톳처럼 들렸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른 나라 말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조용우 세컨드핸드’


빈티지샵을 들여다보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옷들. 내륙의 어떤 곳일까. 류베르나일까. 시칠리의 섬일까. 카프리일까. 연변이나 블라디보스토크일까.


원피스와 셔츠, 가방, 구두들. 그것이 누구의 옷이든 옷걸이에 잘 걸려있다. 노동을 위한 옷은 확실히 아니다. 해변에서 입으면 좋을 릴 원피스, 좋은 마직. 금색단추. 린넨 바지와 코트.


분명 일상의 옷들은 아니다. 부엌을 벽난로를 정원을 산책을 위한 옷들이 아니다. 어디 ‘잠깐 다녀올게’용用도 아니다. 고유한 패턴, 여름 셔츠에 쌓아올린 오록볼록 레고의 빛깔들. 산맥에서 내려다본 초원의 천막 같아. 그 옷이 허름한 청바지를 입고 있는 진열장.


오늘은 재량휴일이래. 그 재량만큼이나 이 빈티지샵은 많은 의복들의 재량을 함유하고 있네. 함유라니,건강보조식품도 아니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돋보이는 수그라들 줄 모르는 약간의 ‘잘난 체’가 남아있는 옷들.


검고 그을린 붉은 터럭의 얼굴들이 진열장을 기웃댄다. 보도블럭을 깔기 위해 모래를 평평히 고르거나 정육점 식당에서 숯을 피우고 석쇠를 닦는 그들이 7월 재량휴일 저녁에 모여 들여다 보는 바다가 그곳에는 가득하다. 수평선 위에 떠있는 의자에 앉고 싶어. 튜바라는 악기가 웅웅대며 휴양지처럼 펼쳐진.


구덩이를 파고 모래찜질을 하며 바다에 떠있는 구름을 봐. 구름들은 광활한 내륙을 달려가는 유목의 말들 같아. 어디서나 펼치면 양젖이 흐르는 천막집 게르의 따뜻한 호롱. 고향에 갈 수 없지만, 이곳이 ‘세컨드핸드’ 고향 같아.


누런 종이에 검고 반듯한 글씨가 여전히 선명했고

-조용우 세컨드핸드’


​양파 다섯, 감자 작은 것으로, 밀가루, 오일(가장 싼 것), 달걀 한 판, 사과 주스, 요거트, 구름, 구름들

-조용우 세컨드핸드’


내 옷들도 구두들들도 훗날 다른 나라에 가 다른 사람을 위한 ‘재량’이 될 것인가. 내 주머니에선 어떤 쪽지가 발견될까. 지하철노선도나 오늘의 소홀한

의무들. 재량휴일을 위한 간편식 재료들. 새송이버섯 한 팩, 냉동오징어필렛. 원양산을 오늘은 용인하자. 우리말은 알 리 없으니 미지의 먼데서 온 불립문자가 되겠지.


​이라고 친구는 읽어 줬다

코트가 죽은 이의 것일지도 모른다며

모르는 사람의 옷은 꺼림직하다고도 했다

-조용우 세컨드핸드’


꺼림직할 것도 불운이 붙어있을 것도 같아. 문 밖에서 천일염 소금을 뿌리고 그 코트를 옷장에 걸지도 모를 당신들과 나와 이국인들. 그곳에는 부모님이 몰래 옷단 솔기 속에 넣어둔 부적lucky charm이 들어있을 줄도 몰라. 이 붉은 그림이 뭘까 들여다보다 결국 불운을 가져오는 걸 까먹은 작은 악귀처럼 그 집 문 앞엔 복조리를 걸어두는 풍속. 그 조리의 세세구멍이 걸러낸 세계의 악덕들.


여전히 조용하고 따뜻한 코트를 버려 두고

이 모든 것을 살뜰히 접어 여기 안쪽에 넣어 두고

-조용우 세컨드핸드’


나는 오늘 그 코트에서 발견된 쪽지처럼 가장 ‘싼 기름’을 살 지도 모르지. 재난을 대비한 휴대용 렌지의 가스통을 구입할 수도 있어. 그리고 빠뜻한 가계의 예산에도 불구하고 구름, 구름들.


경포라는 어떤 해변에 걸려있는 구름들을 쇼핑카트에 담을까. 카운터의 직원은 이 구름들을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달다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 갸우뚱할까. 이건 가격을 매길 수가 없어요. 그냥 오늘의 날씨 같은 거니 그냥 공짜예요.


​상점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하나씩 바구니에 담아 넣을 수 있다

-조용우 세컨드핸드’


나는 위반하고 조롱한다. 바구니에 쇼핑카트에 담긴 구름을, 이 어설픈 애상을, 낭만을. 그러나 어느틈에 구름은 내 발가락에 걸려있다. 서먹하고 친애하는 동료의 신발이 내 발에 걸려있다. 일명 ‘쪼리’라는 거. 그녀의 여행가방 속에 한 짝씩 지퍼팩에 깨끗이

포장되어 있던 거. 그 투명한 비닐에 한 두 알갱이 모래알들.


이걸 신고 노리치의 해변을 혼자 걸었겠지. 일교차가 큰 그곳에서 몸살끼를 느끼면 따끈한 국이 그리웠겠지. 그러나 해변식당에서 시킨 수프는 짜고 느끼하고 너무 걸쭉하고 결국 식어빠져 먹을 수 없었겠지.


차고 식어빠진 구름.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삶보다 시차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들. 노란 중앙선도 죽음의 전조도 경적도 울리지 않던 구름.


외딴 시골마을이라도 포에트리 축제가 있다면 어디든 불법체류자처럼 달려가던 폭죽의 시간. 그 축제의 삐꺽대는 간이의자에 앉아 그녀의 발에서 까닥되고 있었을 신발.


신발은 폭발한다. 시의 탄창을 터뜨린다. 신발은 폭발한다.


부엌 식탁에 앉아 시큼하기만 한 요거트를 맛있게 떠먹을 수도 있다

-조용우 세컨드핸드’


그곳의 구름은 시큼하고 유일하게 입맛에 맞았어. 그 시의 축제에서 부글부글 기포가 올라오면 구름은 갑자기 스콜이 되었어.


내게 재량을 더 주었더라면, 번역도 할 것이 너무 많았는데. 이를테면 번역시들. *제임스테이트의 ‘흰당나귀의 도시’도 우리말로 바꾸면 세컨핸드 샵의 ‘세컨핸드’ 시가 되는 거지. 그렇게 우리 땅에 정착하는 거지.


저 시큼한 요거트가 언제 우리의 것인 적 있나.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나 즐길 수 있잖아.


*James Tate, Return to the City of White Donkeys, 최정례 번역


*마그리트 Magritte, René , 폭풍우의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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