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
공원에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분수가 나오는 공원에서 웃고 떠들며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참 귀엽다.
"아이들이 저렇게 천진난만할 때가 제일 예쁘다니까."
나를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보기만 해도 마냥 행복한가 보다.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까지, 공원 여기저기에 놓인 놀이기구에서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다.
나도 아이들에게 저절로 눈길이 간다.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한 아이가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정말 귀엽네',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를 계속 지켜봤다.
시간이 지나자 부모들이 하나둘 아이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서연아, 집에 가자!"
"재영아, 집에 가자!"
아이들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노는 것은 시간을 무화시킨다. 하루 종일 놀아도 그저 재미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세상을 배우는 최고의 교육이다.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게 보채기도 하고 집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 모습조차도 참 귀여웠다.
하지만 그중 한 아이는 달랐다. 엄마가 부르자 친구들과 놀던 것을 멈추고 벌떡 일어나더니 이내 엄마에게 다다 갔다. 친구들을 아쉬운 듯 돌아보긴 했지만 결국 고개를 숙이고 엄마 뒤를 따라갔다. 아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다. 자동인형처럼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항상 에너지가 넘쳤다. 학교가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등교할 때마다 뛰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너무 빨리 뛰다가 어느 여선생님과 부딪치고 말았다.
"어디를 보고 다니는 거야!"
선생님은 돌아서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내 뺨을 세게 후려쳤다. 어린 초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말이다. 갑자기 번개라도 친 듯 눈앞이 아득해졌다. 맞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 충격은 엄청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선생님은 이미 사라졌고 주변에는 친구들이 불쌍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피한 마음에 눈물이 났고,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인 채 학교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뛰어다니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게 두려워졌고,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이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압도적인 힘에 의해 기가 죽은, 무기력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보며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 아이는 얌전하고 말 잘 들어요."
이웃들도 그 말을 듣고 나를 칭찬하곤 했다.
"아, 정말 얌전한 아이구나."
하지만 나는 그냥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마음속엔 늘 불안감이 가득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두려웠다. 결국 친구도 거의 사귀지 못하고, 항상 혼자 있는 게 편했다.
그 사건 이후로 내 삶은 많이 바뀌었다. 나는 부모님 말씀처럼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아이였지만, 그 대가로 친구와 어울려 뛰어노는 시간도 잃었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어린 시절, 집 뒤에는 개천이 있었다. 졸졸 흐르는 개천은 나에게 좋은 동무가 되어 주었다. 친구가 없던 나는 그곳에 혼자 앉아 흘러가는 물길을 바라보곤 했다.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 사라지는 것처럼 시원했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마음속 무거운 감정을 잠시나마 씻어내는 순간이었다.
홀로 공상을 많이 했던 나는 우주를 날아다니는 꿈도 자주 꾸었다. 별들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꿈, 커다란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상상, 하지만 그 속에는 종종 악몽도 섞여 있었다. 무서운 귀신이 나를 잡아가는 꿈은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나타났다.
아이는 뛰어놀아야 한다. 그래야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성장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활발하게 뛰어노는 아이는 얌전한 아이보다 자아실현과 목적의식이 더 강하다는 결과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에 묶여 뛰어놀 시간이 없다. 방과 후에도, 방학에도 학원에 가야 하니,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린 나 또한 무서운 여선생을 만난 뒤로 놀이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다. 위압감이 그 어떤 것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책상 앞 공부도 중요하지만, 뛰어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야 정신적, 체력적으로 건강 하게 자랄 수 있다. 내 안의 어린 나는 공원에서 무기력하게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가는 어린아이의 다른 손을 꼭 잡아 주고 싶었다. 나에게 뺨을 때렸던 여선생과 아이의 놀이를 빼앗는 엄마는 무엇이 다를까?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하는 건 심장한테 뛰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야누슈 코르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