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란 부모노릇의 미학.
우리집 사전에 할많하않 은 없다.
말도 안되는 얘기다.
할말이 많은데 그거를 안하다니...
할말을 다 하고 다섯번정도는 반복하는게 기본인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말을 다 해야만
그날 밤 잠을 잘 수 있다.
처음 남편 (당시 남친)의 친한 친구가 영국에서
방문을 했었는데, 그 친구가 나를 몇번 만나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아씨는, 암은 안 걸리겠다."
"왜요?"
"가만 보니까.. 하고 싶은말은 다 하는거 같애서."
사귄지 얼마 안되는 남친의 베프라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언행을 조심했을텐데도
이삼일만에 이런말을 들을 정도다.
남편 역시 나만큼이나 병세가 깊다.
거기다가 말까지 무지 많아서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흥이 나서 얘기하기 시작하면
숨은 쉬고 있는건지 입이 아프지는 않은지
중간 중간 챙겨주어야 한다.
자칫 산소부족이나 입술경련으로 쓰러질수도 있으니.
그런 우리 둘이 만나니 너무 할말 안할말 가림없이
필터를 꽂아놓지 않고 물을 붓듯이 아주 콸콸콸 다 말한다.
보통은 부부들이 서로 말을 안하고 소통이 적어져서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는데 우리는 너무 말을 많이 해서
늘 말꼬리 잡히고 싸우게 된다.
뉴욕에 처음 이사와서 지하철이나 길 디렉션 문제로
여러번 싸웠는데,
내가 길치라서 늘상 모든 길안내 역할을 맡던 남편은
자기가 나보다 길을 잘 찾는다고 철썩같이 믿고있고
난 예전에 뉴욕에 살았기 때문에
뉴욕 초짜보단 잘 안다고 생각해서
확신에 가득찬 주장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에이를 타야하냐, 비를 타야하냐 시작해서
진지하게 서로 내말만 맞다고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내말이 맞다니까!!!!
지하철역에 서서 애를 목마 태운채.
이제 막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한 하진이 갑자기
리듬을 타며
에이~비 씨디!이!엪! 지! 하더니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내말이 맞아?!!!??? 하는데
그게 너무 웃겨서 싸움을 그만뒀다.
하진 앞에서 이런 중요치 않는 일들로 목소리 높이는게
너무 싫어서 남편에게 큰소리 내지 말자고 몇번이나 제안하다가 그걸로 또 싸우기도 했다.
니 목소리가 더 크잖아!!
무슨 소리야! 방금도 네 목소리가 더 컸구만!
지금!! 바로 지금 소리 지르는 사람 누구야 엉?!!
이러면서. 덤앤더머처럼.
남편은 하진이에게 부모도 사람이고
말다툼도 하고 의견이 다를수도 있고
그럴때는 좀 흥분하고 목소리가 높아져도
대화(?)로 해결하고 중간점을 찾아가는 미숙한 부모로의 모습을 보여주는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부족한 모습을 고치기 보다는
자신의 부족하기도 한 모습을
하진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뭔소리냐고 일축했는데 잘 생각해보면
나 역시 예전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막 예쁘지는 않아도
내가 막 돈을 엄청 잘 벌지는 않아도
내 궁뎅이가 엄청 성나있지 않아도
뭐 하나 크게 내세울게 없어 보여도
그런 모습마저도 전부 내 매력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전체적으로 뺄거 잘 빼고 넣을거 넉넉히 넣어준
가성비 꽤 좋은 패키지라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이 패키지에서 빠진 것들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없었다.
근자감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심자감으로 개명을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그런데 하진이 앞에서만은
늘 내가 부족한것만 같아 자꾸 미안하다.
더 훌륭한 엄마면 얼마나 좋을까,
불쌍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는 엄마였다면,
좀 더 친절한 성격이었더라면,
더 젊어보이는 사람이면 좋을텐데.
하바드 예일 서울대를 나온 엄마면 어떨까,
더 체력도 좋고 아이같은 마음을 가진 엄마면 좋았을껄,
인내심도 더 있고
네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좋아하면 좋을껄.
돈을 더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더 성공한 엄마면
너한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남편도 그런말을 하면서도
하진이 앞에서는 늘 조심을 하려는 편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진듯 싶다.
여전히 어린 하진이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부모가 다투는 것은 불안감을 준다 생각해
조심하자는 주의지만
남편의 주장이 어떤면에선
아주 틀린말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부모도 화가 날 수 있고 흥분도 하고
실수도 하는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게
나쁘지만은 않을것이다.
나는 완벽하고 부족함 없이
늘 미스코리아같은 웃음을 짓는 엄마가 되어
완벽 그러니까 흠이 없는 옥구슬같은 삶을
하진에게 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아무리 부모가 노력한다 해도
어차피 스크레치 하나 안난 옥구슬같은 삶이란 없다.
그러니 부족한 것들을 즐길수 있는 방법과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주는게
나을 것이다.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 대신에
부족한 부모를 받아들이는 것을 가르쳐주고
서로를 채워주는 관계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