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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Oct 04. 2024

후쿠오카 여행의 시작과 끝

하카타역에서 보내는 편안한 일상 여행

나의 동굴, 후쿠오카. 관광 목적이 아닌 도피성 여행이라 언제나 일정은 짧다. 대게는 1박 2일 이거나 당일치기다. 한번 가는데 길게 다녀오라고 하지만 누구의 말처럼 ‘애 키우는 엄마’가 어디 그럴 수 있나. 스스로 역할을 한계 짓고 1박 2일도 감지덕지다. 육아 휴직 중이었던 당시 돈도 시간도 여유롭지 않아 늘 빠듯했다. 그럼에도 혼자 여행을 갈 수 있음에 늘 감사했다. 언감생심 애 딸린 엄마가, 그것도 애가 둘씩이나 되는 엄마가 어디 여행을 감히 갈 수 있겠나 상상도 못 했다. 그런 나를, 미쳐가던 나를 보던 남편의 지혜로운 떠밀림에 못 이기는 척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떠남은 고립이고 곧 자유다.

이유야 어쨌든 짧은 일정은 목적에 맞게 최적화된 동선이 요구된다. 당시 나의 목적은 늘 ‘쉼’이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쉼의 방법도 여러 가지겠지만 나의 경우 쉼은 ‘자발적 고립’이다. 한국에서 비행기 이륙 후 딱 1시간 30분 이면 하카타역에 도착해 있다. 착륙, 입국 심사, 시내 진입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낯선 곳에서의 뜻 모를 말과 글자들. 나를 둘러싼 언어들을 알지 못해, 이해하지 못해 안도감을 느낀다. 더 이상 나는 무언가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떠남이 고립이고 곧 자유였다. 


짧은 일정에 걸맞은 최적화된 동선, 하카타역

떠나왔다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고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면 쉼이 아닌 고행길이다. 숙소를 중심으로 ‘먹고 자고 쉴’ 계획을 최적화해야 한다. 어느 지역이나 역사를 중심으로 인프라가 잘 되어있는데 후쿠오카 역시 그렇다. 역 주변으로 대욕장까지 갖추어진 깔끔한 숙소를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다. 나는 후쿠오카에서 가장 큰 역사인 하카타역을 중심으로 짧은 일정을 계획한다. 


노란 가을 단풍이 물든 '니시테츠 크롬 하카타'숙소 앞 거리



역 앞 숙소 - 니시테츠 크롬 하카타


‘니시테츠 크롬 하카타’. 하카타역 주변의 여러 숙소를 다녀봤지만 나에게 이곳 만한 곳이 없다. 1박 2일 짧은 일정에 최적인 숙소다. 길 하나 건너면 하카타역과 버스터미널이 있다. 그곳을 통해 최근 지어진 라라포트 쇼핑몰도 갈 수 있고 가깝게는 ‘다자이후’, 멀게는 뱃부, 유후인, 구마모토, 구로가와, 나가사키 등 JR선을 타고 소도시 여행도 가능하다. 또한 다양한 일일투어 출발지도 대개 하카타역이어서 일일투어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호텔은 큰 대로변에 있어 늦은 밤 어두운 골목을 지나지 않아도 숙소에 당도할 수 있고 조식을 먹지 않아도 근처 역 주변으로 이른 아침 식사가 가능 한 곳들이 많아 이용하기 편리하다. 


무엇 보다 이곳에는 온천물은 아니지만 대욕장이 있어 느긋하게 반신욕 하기 좋다. 작지만 건식 사우나도 있고 야외 노천탕도 있어 갑갑한 실내탕을 벗어나 시원한 바람을 쐬며 따뜻한 탕 안에 앉아 있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때론 물이 너무 뜨거워 서둘러 나오거나 미지근해 시시할 때가 있는데 이곳 물 온도는 내게 딱 맞다. 게다가 여성 전용층이 있어 호텔에서 제공하는 관내복을 입고 젖은 머리를 한 채 방문을 여는 순간 옆방 남자와 마주칠 일이 없어 당황스럽지 않다. 


내가 원하는 맛있는 음식을 여유롭게 먹고 역 주변에서 쇼핑하다 돌아와 깨끗이 씻고 쉬다 오기 적합한 숙소다. 다만 내가 이곳에 다닌 지 오래되었든 이곳도 세월을 머금어 이젠 시설물들에서 세월이 느껴진다. 바닥 카펫에 오랜 흔적들이 남아있고 위치 때문인지 물가가 올라서 그런지 처음 이용했을 때 보다 가격이 많이 올랐다. 이만한 곳이 없었는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이제는 다른 곳을 찾아야 할 듯싶다.


https://maps.app.goo.gl/EHNvhbTDMXZcHWEZA


하카타역을 중심으로 한 필수템 쇼핑 - 다이소, 유니클로, 러쉬, 나이키, 드럭 스토어

역 앞 숙소는 기차나 버스를 탄 여행이 아니더라도 하카타역 중심으로 쇼핑몰들이 나란히 붙어 있어 쇼핑하고 무거운 짐을 바로 호텔에 가져다 놓을 수 있어 편하다. 20대 때는 물건 구경하느라 짐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바리바리 들고 다녔지만 이젠 체력이 안 된다. 중간중간 쉬어주어야 몸도 가볍고 짐도 가벼워진다.


하카타역 유니클로에서는 속옷과 양말, 러쉬에서는 베스밤, 다이소에선 과자, 문구, 생활필수품, 나이키에서 운동화와 운동복, 드럭 스토어에서는 늘 쓰는 화장품과 약들, 편의점에선 음료수와 그날 먹을 주전부리들 등 자주 가는 매장들을 한 바퀴 돌고 늘 쓰던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아 숙소에 들러 잠시 쉰다. 백화점 식품관에서 사 온 알록달록 케이크와 과일 등 디저트를 먹으면서 말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때 컨디션이 괜찮으면 캐널시티와 돈키호텔 나카스점까지 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굳이 별도의 동선을 잡지 않는다. 도보 15분 거리지만 때론 이 거리조차 멀게 느껴진다. 


고급 코스요리를 런치로 즐기기 - 닌교초이마한

하카타역을 중심으로 한 짧은 동선이지만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허기가 진다. 1박 2일 여행에서 끼니는 단 3끼뿐이니 가장 먹고 싶은 걸 먹는다.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은 비싼 스키야끼를 런치코스로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는 닌쿄초이마한. 디너코스로는 1인 만 엔 이상이지만 런치는 반값에 대접받을 수 있다. 일본 전통의상을 입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께서 내어 오는 음식을 일본 특유의 영어 악센트로 혼신의 힘을 다해 설명해 주는 곳이었다.


식전에 제공되는 사시미와 작은 찬들은 화려한 색상의 오밀조밀한 접시에 서빙된다. 그곳에서 계절을 마주한다. 단풍 시즌이어서 그런지 음식과 어우러진 단풍잎과 솔잎 등으로 장식한 소담스러운 1인용 정원. 연세가 꽤 있으신데도 영어로 길게 설명해 주시는데 죄송하게도 절반 이상은 못 알아 들었지만 내 앞에 놓인 작은 정원만으로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전식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스키야끼가 테이블 위에서 만들어진다. 달구어진 팬에 올려지는 신선한 야채들, 그 재료들을 정성껏 최상의 맛으로 즉석에서 조리해 주는 손동작, 작은 공기에 재료 하나씩 하나씩 먹기 좋게 올려 놓아주시는데 황송하게도 나는 그 동작들을 감상하다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물론 ‘감사합니다.’는 잊지 않는다. 

닌교초이마한 스키야키


야채와 고기 순으로 2회 정도 팬을 돌리면 마지막으로 스키야키의 피날레인 계란밥. 계란 물을 휙휙 저어 갖은 재료들로 조리되었던 스키야키 팬 위에 붓고 미디엄으로 달걀물을 구워낸다. 그리고 그것을 흰쌀밥 위에 포근히 이불처럼 덮어준다. 


처음 스키야키를 먹은 날은 내 인생에 없던 별천지의 맛이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었구나. 내 생애 없던 맛이다. 싶을 정도로 아주 맛있게 식사를 했다. 일본의 작은 정원을 닮아있는 애피타이저와 숙련된 기술자의 간결하면서도 재빠른 손놀림을 혼자 앉아 감탄하며 먹고 있노라면 호사스럽기 그지없다. 마무리로 시원한 샤벳으로 입가심을 하고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자리를 뜬다. 나 역시 정중하게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고 또다시 길을 나선다.



https://maps.app.goo.gl/6LnW5HaTXJJ49z7P6


식후 커피는 사이폰 커피로 해주세요 - 코히샤노다

맛있는 음식은 맛있는 커피를 부른다. 하카타역으로 이어지는 거미줄 같은 지하도를 거닐다 보면 한 곳에서 오래도록 커피를 내리는 곳들이 많다. 내가 가는 이곳도 그렇다. 닌교초이마한이 있는 한큐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와 좀 걷다 보면 한쪽 구석진 곳에 콕 박혀있는 이곳. 사이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물론 한큐백화점에도 있지만 굳이 보물찾기 하듯 외따로이 있는 좁은 이곳을 찾는다. 거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아늑하다고나 할까?! 혼자 조용히 커피를 즐기기에 좋다. 


조용한 하카타역 지하도에 위치한 '코히샤노다', 사이폰 커피와 달달한 케이크


혼자는 늘 바 테이블이다. 이곳도 나이 지긋한 분이 커피를 내어 주신다. 주름진 손이 장인이라 여겨지는 편견. 그 짧은 생각으로 보다 깊은 맛과 향이라 여기며 음미한다. 게다가 흔치 않게 접하는 사이폰 커피(진공커피)다. 증기압과 중력으로 커피를 축출하는 방식. 투명한 알코올램프와 둥근 비커에서 만들어지는 커피. 맑은 물이 작지만 한껏 이글거리는 램프 불꽃에 보글보글 끌어 오르다 바리스타가 커피를 비커 속에 넣고 휘휘 젖곤 이내 진한 커피가 탄생한다. 물멍, 불멍 하듯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잔잔해진다.

 

커피가 내게 온다. 예쁜 잔에 담겨서. 새하얀 크림과 함께. 온 과정이 정성스럽다. 크림조차 먹는 내내 단단하라고 얼음을 넣은 잔에 담겨 온다. 곱게 내어주는 커피를 고운 마음으로 조금씩 천천히 음미한다. 아침까지도 아이들과 종종거렸던 나와 지금의 내가 정겹게 손을 잡는 순간이다. 소중한 나다.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나도 있고 이렇게 정성스레 커피를 마주하는 나도 있다. 커피 한 잔에 숨을 고른다. 


https://maps.app.goo.gl/NM6dHp3XUqqTZQ9A7



후쿠오카, 아니 하카타역 주변을 배회하는 짧은 여행은 내게 오아시스였다. 엄마로서 익숙하지 않은 자아를 받아들이고 그간 잃었던 나를 헤집고 찾아내는 일상의 일탈이었다. 무리하지 않게 당도할 수 있는 짧은 여정에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과 커피를 정성스레 대접받곤 사랑스럽게 다시 나를 드려다 보는 시간이었다. 이제 기저귀 차던 아가들은 제 주장이 또렷한 어린이로 컸고 약 먹어가며 힘겹게 버텼던 회사도 접어 도피하듯 그곳에 가지 않는다. 좀 더 여유 있게 그곳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일탈을 감행할 수 있었던 과거, 그리고 유유자적 갈 수 있는 지금. 예나 지금이나 일상을 비껴가도 별일 없는 내일이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그 길을 지나와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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