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 그냥 그렇게 여행한다. 인생도.
시작은 나가사키 짬뽕과 카스테라 였다. 나가사키 먹방 당일투어가 취소되어 기차표를 알아보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가려면 직행열차가 없고 중간에 다케오 온센역에서 다른 열차로 환승해야 한다. 다케오 온센역.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얼마 전 읽은 책 내용에서 언급된 ‘지적자본론’의 산물, 다케오 시립 도서관. 츠타야 서점과 함께한 지역도서관이 유명해지면서 이곳으로 부러 이사를 온다고 한다. 검색을 해보니 관광객들도 아름아름 이곳을 많이 찾는 모양이다. 이미 다수의 블로그에서 다케오 도서관, 3000년 된 녹나무, 다케오 온센 로몬을 대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책 읽기와 자연경관, 온천. 내가 좋아하는 3대 키워드를 모두 갖추고 있으니 그곳에 안 갈 수가 없다. 다만 인기 있는 하우스텐보행으로 이른 출발과 이른 오후 도착으로 표를 끊을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첫 자전거 여행
나이 들어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바쁜 걸음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 틈바구니에서 떠나는 기차여행은 힘들고 귀찮기 짝이 없다. 녹초가 되어 꾸벅꾸벅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이 도시에서 목적지는 명확했지만 비몽사몽 내려 낯설 곳을 탐색하니 카페도 아직 오픈하지 않은 이 시간에 무엇부터 해야 하나 한참 버퍼링 중이다. 이때 눈에 들어온 빨간 자전거. 렌트가 가능하단다. 그래? 한번 타 볼까? 짐도 맡겨준다는데 렌트값이 1,000엔이면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한결 가벼운 여행이 될 것 같다. 여권 확인과 신청서 작성. 간결한 절차에 따라 자전거를 빌렸다. 자전거에 탑재된 거치대에 핸드폰을 고정하고 오늘의 첫 목적지 ‘다케오 도서관’으로 향한다. '어라, 이거 전기 자전거네.' 전원을 켜면 힘찬 발구르기 한 번으로 몇십 미터를 나아간다. 조금씩 나아갈 때마다 미소가 지어진다. 제법 재미있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 낯선 일본 시골마을에서 타는 자전거 맛은 청량하다. 한산한 거리와 시원한 바람을 가르니 기분이 상쾌하다. 막힘 없이 흘러가는 지금의 내 시간과 닮아있다.
다케오 도서관에서 커피 한잔과 책 읽기
자전거를 주차하는데 우리말이 들린다. 작은 도시지만 ‘츠타야 도서관’을 보기 위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시골동네를 방문한다. 이곳에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 책 읽기. 무언가 돈 주고 소비하는 쇼핑이 아닌 책을 좋아하는 이들 속에 파묻혀 같이 책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다. 이른 기차시간으로 아침도 못 먹고 출발해 도서관 안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과 빵으로 허기를 채운다. 그리고 동네도서관에서 빌려 비행기까지 같이 타고 온 책을 보며 영혼을 채워본다. 책 읽기를 통해 삶에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글을 쓰며 하는 책 읽기는 자기반성이다. 쉽게 쉽게 읽히는 다른 사람의 책을 보니 내 글은 길고 인생에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일상에 힘이 되어주는 글이었으면 좋겠는데 내 글은 이 글처럼 그러한가 반문하게 된다. 가볍게 들고 온 책, 가볍게 읽고 내려놓고 싶지만 저자의 글쓰기 무게가 느껴진다. 이 글을 쓰느라 얼마나 고심했을까. 나 역시 고심하며 글을 쓰고 있는가 되돌아보게 된다.
이름 모를 녹나무
시간을 가름하니 이쯤에서 일어나야겠다. 그래야 3000년 된 녹나무도 보고 점심도 먹고 온천욕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힘찬 발구르기 한 번으로 자전거는 저 멀리 나아간다. 발구르기 몇 번으로 도착한 녹나무. 분명 오래된 녹나무는 내 눈앞에 떡 하니 서있는데 주변에 사람이 없다. 이상하다. 이런! 역사가 깊은 녹나무가 2그루다. 내가 가려던 곳을 이미 지나쳐버렸다. 아마도 자전거 타는 맛에 아무 생각 없이 씽씽 달린 모양이다. 이왕지사 왔으니 녹나무를 매만져본다. 어른 10명이 양팔을 벌려 둘러싸도 안 될 것 같은 두꺼운 나무 둘레. 깊이 묻혀 있어야 할 뿌리가 나온 것인지 나무기둥이 갈라진 것인지 구분조차 어려운 나무. 곧게 뻗어 올라가 있어야 할 기둥은 중간에 사라진 지 오래라 나무 안은 뻥 뚫려있다. 나무 안 속살은 긴 역사만큼이나 그 나이테는 가름할 수가 없다. 오래된 사물에는 영혼이 깃든 것 같다. 마치 나무가 주술을 부려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우스깡스러운 상상이지만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산 중턱에 놓인 오래된 녹나무 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으스스하다. 다음 행선지로 발을 재촉해 본다.
3000년 된 녹나무
제대로 찾은 녹나무는 관광스팟 스럽다. 신사 안쪽에 있어서 그런지 입구부터 화려하다. 사람들도 여럿 무리 지어 있고 신사 옆길로 난 잘 닦여진 길은 기원전부터 이곳을 지키고 이던 녹나무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안내한다. 양쪽 길 옆으로 높게 뻗은 나무들이 고요히 녹나무를 지키고 서 있다. 한쪽에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있는 작은 돌탑이 놓여 있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나보다. 오랜 세월을 이겨낸 것(곳)은 영험하다는 믿음. 소원을 빌면 마치 램프의 요정처럼 소원을 이루어 줄 것만 같은 믿음. 나도 그 믿음에 기대어 본다. 고작 50엔이지만 50엔어치만 소원을 들어주진 않겠지.
예기치 않게 녹나무를 2그루나 봤다. 한 곳은 손상되지 않은 나무여서 그런지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게 신사와 같이 모셔져 있고 한 곳은 버려진 듯 관리가 안 되는 상태 같다. 안내지도와 구글맵에서나 점 하나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어쩌다 보니 흘러 들어와 그 오랜 세월의 속살을 볼 수 있었다. 맵시를 자랑하는 영험한 녹나무는 멀리서 바라만 봤지만 허리가 잘려나간 녹나무는 그 속살까지도 보여준다. 뭐든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야 대접받는 건 사람이나 사물이다 매한가지 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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