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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Aug 03. 2022

4. 입양도 팔자에 있어야 하지.

  나는 내 미래를 처음부터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사람은 무의식 중에 자신의 미래를 알아채기도 하니까. 내가 임신을 하기 쉽지 않다는 걸, 끝내 입양을 하게 될 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결혼을 하기 전, 나는 남편에게 입양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은 당황한 듯했지만, 남편은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듯 남편은 입양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좋은 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어떻게 표현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집 앞에서 헤어지기 전 이야기했던 그 순간의 분위기는 기억난다. 주차된 차 안에서 나란히 앉아 남편의 답변을 기다리던 순간의 긴장감도 기억에 남아있다. 남편은 아이를 둘 정도 낳아 어느 정도 기르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 명쯤 입양을 해서 키우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었다. ‘좋은 일이지...’ 정도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입양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대 나는 못할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일단 당장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 당시엔 나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언젠가 세계일주를 할 거라거나, 퇴직 후엔 봉사를  하며 살고 싶다는 바람과 비슷했다. 뭐 그런 생각도 있지만, 꼭 해야 한다는 건 아닌 정도였달까

? 주변에 입양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난 왜 입양을 생각했던 걸까?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봤든, 영화를 봤든, 입양한 연예인들의 모습에서 뭘 느꼈든 뭔가 계기가 있긴 했을 텐데 솔직히 딱 기억나는 명확한 계기는 없다. 그날 남편과의 대화가 입양에 대한 의미 있는 첫 기억이다. 정말 우리가 결혼 후 아이를 둘 정도 낳게 되었고, 아이들이 중, 고등학생쯤 되었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그 후에 정말 입양을 했을까? 알 수 없다.

  어쨌든 우린 결혼 전, 정말 짧은 순간 그렇게 입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게 다다. 7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 그 이야기는 현실이 되었다.

  우린 결혼 후 일 년 동안 주말부부로 지냈다. 일 년 뒤 집을 합치면서 임신을 준비했다. 함께 살기만 하면 바로 될 줄 알았는데 임신은 쉽지 않았다. 반년이 채 되지 않아 나는 산부인과에서 초음파로 배란일을 확인해가며 소위 노력이라는 걸 시작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난임 병원을 찾았고 바로 인공수정을 시도했다. 어찌 보면 매우 빠른 대처였다. 각종 검사로 우리는 둘 다 건강상으로 임신에 문제가 없는 상태였지만, 매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 사이 나는 세 번의 인공수정에 실패했다. 그 뒤 세 곳의 병원을 거치며 다섯 번의 시험관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동안 나의 정신은 점점 망가져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임신만이 아이를 갖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음을 기억해냈다. 나는 난임 카페 대신 입양 관련 카페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는 입양 팟캐스트를 즐겨 들었다. 나는 시술을 빨리 마무리 짓고 입양 절차를 시작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남편은 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를 구걸했다. 나를 얼르고 달랬다. 남편도 그때쯤엔 계속되는 시술 실패에 아이를 둘 이상 갖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한 명만 낳고, 둘째는 입양하자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뀌어 있었다.

  남편은 특히 입양 후 친생 자녀가 생기는 것에 대해 걱정스러워했다. 아무래도 어린 막내에게 손이 많이 가고, 첫째에게 배려를 요구할 상황이 잦을 텐데 첫째가 입양아라면 괜히 아이가 오해하고 마음고생을 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난임 병원을 다니면서 시도해도 임신이 안되는데 입양 후 혹시 모를 자연 임신은 과한 걱정이라 여겼지만 과학적으로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았다. 강하게 내 생각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간절히 원하는데 아이가 안 생기면 마음이 참 약해진다. 아이를 입양하기 전 해엔 근처에 막 신내림을 받았다는 무당에게 점을 보러 갔었다. 난임 시술이 계속 실패하니, 우울감이 더해가던 시기였다. 정말 아이가 생기긴 하는지, 집에 반려 동물로 고양이를 키워보고 싶은데 어떨지, 입양을 하는 건 어떨지 등을 물었었다. 점집에선 서른여덟이 되기 전에 아이가 생긴다고 했고, 고양이든 강아지든 키우지 말라고 했고, 입양도 사주에 있어야 하는데 우리 둘 사이엔 그런 사주가 없어 입양을 하려고 해도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입양할 팔자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때 내겐 서른여덟은 너무 멀었고, 고양이도, 입양도 안 된다고 하니 속만 상해 돌아왔다.  

  결론적으로, 나는 무당의 말을 무시했다.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과감히 결정을 내렸다. 그해 겨울, 우린 고양이를 한 마리 들였다. 그리고 그다음 해 아이가 우리에게 왔다. 구청에 가서 입양신고를 하고 아이가 호적에 들어올 때까지, 팔자에 없다니 혹시 입양이 중도에 기각되거나 혹은 취소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했었다. 혹시 입양 자격에 문제가 있다면 법원은 입양을 기각한다. 또 친모가 아기를 다시 키울 마음을 갖는다면  입양 절차는 중도에 취소된다. 다행인 건지 (아이가 친생모에게서 자랄 기회를 잃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말하기엔 아이에게 미안하다.) 아이의 입양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무당이 말했던 서른여덟을 진작에 넘겼지만, 여전히 임신이 된 적은 없다.

  솔직히 나는 결혼 전엔 친구들과 사주 카페에 가 사주나 궁합을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취업 시험을 칠 때 엄마가 점집에 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듣고 와서, 시험 치는 날 뒤를 안 돌아보려고 애썼던 웃픈 기억도 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샤머니즘이 내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점집을 다녀온 이후 점이나 사주는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아기가 별 탈 없이 우리 호적에 오른 이후엔 점이나 사주에 대한 믿음이 내게서 완전히 사라진 듯하다.

  신이나 귀신이 우리가 할 일의 가능성을 더 열어줄지도, 닫아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궁합이 좋다는 말에 기뻐하고, 조심하라는 말에 겁내던 때가 있었다. 이젠 다르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건 인간의 의지이다. 신이 친절히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자. 당신 앞에 무겁게 닫힌 문은 어쩌면 잠겨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돌아서지 말고 한번 도전해보자. 고민하지 말고 문고리를 잡고 힘껏 돌려라. 그래도 안 열린다면 부숴버리고 들어가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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