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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Apr 12. 2019

40대에게 용기란

폐업을 하고 4개월쯤 되었을 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청소 일이었다. 육아와 번역 일에 청소까지 하기에는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란 이웃 친구의 민박집 청소를 내가 도와주기로 했다. 그 친구가 청소할 사람을 구한다고 SNS에 올린 글을 보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내가 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안 그래도 백수생활이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알바를 찾고 있었다. 그때는 정식으로 취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6년 동안 민박집을 운영하다가 그만 둔 이유들 중에는 청소가 지긋지긋하다는 것도 약간, 아주 약간의 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일을 차분하고 묵묵하게 해내는 것이 장인의 길이라고 생각이다. 30년을 매일같이 청소하고 빨래하는 사람에게서 어떤 포스가 느껴질지 상상이 된다. 그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청소아르바이트에는 책임감이 없다.

바로 그거다. 단 한 톨의 책임감도 없이 기계적으로 하면 되는 일. 몸이 조금 힘들더라도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그런 일이라면 평생 직업으로 삼아도 될 것 같다. 내 가게가 아니니 책임감 없이 정해진 일만 기계적으로 하고 돌아오면 된다. 6년 동안 쉬지 않고 하던 일이니 전문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손이 엄청나게 빠르다. 아마 전국 상위 5%에는 들어갈 거라고 자신한다. 손 빠르기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욕실 솔질이며, 침구 정리며, 바닥 청소며 뚝딱뚝딱 슥삭슥삭 뿌스럭뿌스럭 후다닥 해치우는 놀라운 능력에 나 스스로도 가끔 놀라니, 나의 적성이 분명한 청소 일을 직업 삼아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도 생각해봤다. 근데 아무래도 돈이 별로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자영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취직은 못 할 거니까. 그래서 매일 자려고 누워서 사업구상을 했다. 제아무리 생각해봐도 할 건 장사뿐이었다. 이걸 팔아볼까, 저걸 팔아볼까. 제주에서 해야 하나, 육지로 가야 하나, 같은 단순한 고민들로 하룻밤에 머릿속으로 쓰는 사업계획서가 10통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새벽이 되면 그 사업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대략 30가지 정도 떠오른다. 밤에는 아이디어가 샘솟고, 새벽에는 현실감각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좀 쉬다가 뭐라도 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백수생활을 시작했다.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를 나중에야 알았다. 카페나 숙박업 같은 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시작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다보면 과연 내가 그 장사를 몇 년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장사가 잘 되면 내 옆에 똑같은 가게가 줄줄이 들어올 테니, 2년 정도 후에는 결국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다. 나도 남이 잘 되는 것 같으니 고민 없이 민박집을 시작했으니까.


돈 끌어 모으고 대출까지 받아서 야심차게 뭘 차려도 독보적인 가게가 될 수 없다. 편의점이 잘 되면 1년 내에 거기가 편의점 골목이 되어 버리고, 치킨집이 잘 되면 그 골목이 치킨타운이 되어버리는 게 이 나라 자영업의 현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년까지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자영업자가 많은 나라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막 입사한 청년들 중 절반 정도는 결국 40대에 퇴직금과 대출과 적금을 털어서 장사를 해야 하는 예비 자영업자들이다. 지금도 자영업자가 넘쳐나고 있고, 내 뒤로도 예비 자영업자들이 끝이 안 보이는 줄을 서있다.


다소 무모하지만, 꿈과 희망이라는 에너지로 무엇이든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40대에겐 힘들 거라는 걸 각오하고 시작할 수 있는 용기 같은 건 없는 것 같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먼저 든다.


그렇다고 꿈 꿀 수 있었던 청년 시절이 좋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지금의 나는 지켜야 할 게 있다. 꿈이라도 있던 청년 시절, 그때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은 상황이다. 다만 꿈 보다는 현실, 그러니까 자영업의 현주소를 잘 안다는 것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억누른다.


지금까지 모은 재산을 한방에 털어먹지 않기 위해서는 어설프게 뭘 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용기와 기다림도 필요하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에 대한 고민과 함께, 어떻게 하면 가진 걸 지켜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확신이 서지 않은 일을 시작하지는 않아야 한다. ‘도전정신’은 멋진 말이지만, 그것이 인생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경우는 드물다. 그나마 인생을 안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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