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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덕이 Feb 16. 2024

10년 차 프리랜서의
휴가는 고달프다

프리랜서에게는 정해진 휴가가 없다.

그래서 프리랜서는 언제든 떠날 수 있으면서도

떠날 수 없다.

마음만 있다면 떠날 수 있지만

동시에 마음이 따라와 주지 않는다면 휴가지에서도

프리랜서는 일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제게도 일어났


거의 7개월 만에 여행길에 올랐다.

지금은 후쿠오카 공항에서 출발해서

우레시노라는 한적하고 작은 온천마을로 향하는 버스 안이다.

원래 이 여행은 3월에 본격적인 일들이 시작되기 전, 리프레시 차원에서 가려고 계획한 여행이었다.

그래서 이 여행의 주목적은 온천과 트레킹이었다. 일부러 유후인도 아닌 더 작은 온천마을을 택한 데에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 계획을 확정하자마자 너무 많은 일신상의 변화가 있었다.

재계약이 확정된 학교에서 막바지에 내게 일정 변경을 요청했고 이미 정해진 일정들이 있어서 어렵다고 했더니 재계약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풀대는 프리랜서의 삶이란….

그래서 부랴부랴 다른 공고에 지원하고 면접을 보고 합격 후 일정 조율 등을 하느라 예상치도 못한 분주한 겨울을 보냈다.

지난주 명절 이야기의 후속담은 결국 연휴 내내 연락을 기다리게 했던 유학원이 마지막에 아직도 못 정했단 말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안 하기로 했다는 새드 엔딩이다.

지금까지 이 유학원이 하기로 해놓고 안 한 건수가 많아 원래도 반쯤은 걸러 듣는 편이지만 이번 건은 여러 차례 나한테 얘기한지라 이미 결정이 난 줄 알았더니…

결국 한 마디 했고(그래봤자 그렇게 세게 말하지도 못했다. 네트워킹 없이 혼자 일하는 나지만 그래도 항상 사람은 ‘혹시’가 있다) 그래서 그나마 안 하기로 했다는 최종결정은 빠르게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고등학교 계약이 날아가면서 이 시국에 해외여행을 가는 게 맞는가라는 생각이 있었다.

돈을 벌 때는 비대한 자아상에 도취하지만

돈이 없을 때는 쪼그라드는 스스로의 모습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도 조건적인 인정과 애정을 주는 걸 알지만

돈 못 벌어도 1-2월에 마음고생은 많이 했으니까!

(그리고 취소 위약금도 만만찮고)

너무 지쳐있어서 힐링을 하러 온다는 마음으로 짐을 쌌다.


프리랜서는 휴가 때 일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대단하다고, 일과 휴식을

구별할 수 있는 절제력과 가치판단력을 가진 분이라 하고 싶다.

적당한 돈을 버는 적당한 프리랜서는

설사 몸은 떠날지라도 오픈 간판은 항시 걸려있어야 한다.

여행 기간에 일은 못 하지만

일에 대한 문의나 조율은 처리해 놓아야

다녀와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번 휴가야말로 정말 일 연락 안 받겠다!!! 는

나의 목표와 정확히 반대되는 일들이

여행을 시작한 지 6시간도 안 되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3박 4일의 짧은 일본 여행이어서

처음으로 로밍을 하지 않고 왔다.

함께 여행을 가는 가족이 로밍을 했으니까

정말 급한 지도 보기는 가족에게 맡기면 되겠단 생각이었다.

그리고 와이파이는 숙소나 공항에서는 다 되니까.

몰려오는 일정 조율로 워낙 지쳐있던 지라 이번에는 이렇게라도 여행 중에는 디지털 디톡스를 하려고 했다.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핸드폰과 떨어져 있는

시간은 불안해하는 전형적인 현대인인지라

큰맘 먹고 로밍을 안 한 것이었다.

그러다 우레시노행 버스를 기다리며 잠깐 10분만 연락 확인해 봐야지~하고 공항 와이파이를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카톡에는 몇 년 전 수업했었던 유학원에서 강의 문의가 와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나의 온 신경은 유학원과의 연락에 가있었다.

앞서 프리랜서란 휴가 중에도 오픈 팻말이 걸려있는 한 연락은 항상 웰컴이어야 한다.

비록 조건이 안 맞아 수업을 못 한다고 해도 연락을 주고받기 전엔 여부를 모르기에 문의에는 빠르고 성실하게 답해야 한다.

이번 수업 문의도 결국 불발에 그쳤지만

마치 이 문의가 포문이라도 연 것처럼

다른 곳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이미 유학원처럼 보이는 전화(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스팸전화)를 받느라 로밍통화료를 50초 치나 낸 후였다.

전화는 고민하다 버스 안이라 받지 못하고 일단은 끊어지게 놔두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난 여전히 달리는 조용한 일본 버스 안이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


분명 나는 일 연락을 안 하고 안 받기 위해 로밍도 안 했는데..

공항과 버스 와이파이가 너무 빵빵해서 잠깐 카톡에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휴가 때마다 항상 이런 비슷한 딜레마를 겪는다.

휴가 와서 절대 일 연락을 받지 않기 위해 오기 전에 모든 연락을 처리하고 오는데(명절맞이와 비슷하다)

명절에는 최소한 정말 급한 연락 아니고선 안 오기라도 하지.

내 휴가는 남들에겐 노는 날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들은 본인들의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일은 나에게 연락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락을 무시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직장인일 때는 휴가 때 부재중 이메일 답장 처리를 해놓고 이메일만 안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전화하는 몰상식한 회사 상사들도 있다지만 다행히 내가 다닌 회사는 휴가 때 연락은 없었다.

하지만 프리랜서가 된 지금은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업무 기회’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놓치는 것이 두려워서

오는 연락에 ‘휴가 중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두렵다.

그건 곧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절대’, ‘꼭’, ‘무조건’ 등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고가 강할수록 삶은 여유가 없고 강박적이 된다.

이런 부적응적 사고를 적응적 사고로 바꾸는 인지행동치료에 관심 가지게 된 이유도 스스로가 인지적인 사람임을 알아서일 것이다.

오히려 생활적 측면에서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나가는 건 할 수 있었다.

많은 측면에서 절대적 사고를 유연하게 바꿀 수 있었지만

유달리 일과 돈에서는 아직도 어렵다.

사실 이미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 자체가

명문대 졸업 후 떠올리는 진로와는 거리가 먼데 말이다.


대기업에서 근무하거나

유명한 사람이 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학문적 성공을 이룬 사람이 된다라는

어릴 때의 목표는

조건화된 자기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직도 완벽하고 유능하지 않을 때 오는 불안은 비합리적이고 부적응적인 것을 알아도 놓아주기가 힘들다.


이제 휴가 첫날이다.

그리고 이제 곧 우레시노라는 작은 마을에 내릴 것이다.

이 휴가 동안 부재중 전화의 콜백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상대방을 실망시키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주지하고 연습할 것이다.

말로만 여유가 아닌,

실천하는 여유와 유연함을 연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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