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오랜만에 긴 꿈을 꾸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짧은 꿈을 여러 편 나누어 꿨다. 휴일이었다. 평소 ‘쉬는 날에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미루어 둔 ‘해야 할 일 리스트’가 있었지만 전기장판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게으름을 부렸다. 지난밤 먹다 남은 야식으로 배를 채우다가, 문득 시원한 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1인분은 배달하지 않는다 길래 물냉면과 회냉면을 하나씩 주문했고, 받은 자리에서 두 그릇을 모두 비웠다. 포만감에 빠져 다시 잠들었고, 중간에 갈증을 느껴서 깼다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또 잠들었다. 하루 동안 네 번 잠들었고, 세 편의 다른 꿈을 꿨다.
꿈에서, 어떤 허름한 집에 들어서자 스승님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백발을 길게 길렀고, 하얀 수염도 이황처럼 길었다. 고생을 많이 했는지 주름이 깊었고 뺨은 홀쭉했다. 나는 반갑게 스승님의 집으로 들어서며 능청스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참 묘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나는 자연스레 그분이 내 스승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내가 어떤 일을 이분에게 배우고 있었는지, 언제부터 어떻게 알고 지냈는지가 자연스레 기억났다. 하지만 스승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너는 누구니?”하고 되물었다. 스승님의 질문에 나는, ‘와! 내가 진짜 제자가 아님을 어떻게 알았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부분 꿈을 자각몽으로 꾼다. 이번에도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고, 꿈 속의 내 모습이 스승의 제자와 똑같은 모습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스승도 ‘내가’ 꿈속 세상의 본인 제자가 아니라, 지금 자고 있는 현실의 ‘나’라는 점을 눈치챘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짐짓, “에이, 스승님 저잖아요. 스승님 제자요!” 하면서 모른 척 연기를 했다. 그러자 스승님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누굴 놀려! 당장 나가, 이놈아!”라고 호통을 쳤고, 나는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다음 꿈은 태국 방콕이었다. 이번에는 무언가 팀 과제 비슷한 것을 하기 위해 방콕까지 갔다. 우리 팀도 해결해야하는 미션이 있었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단체로 움직이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의 과제를 혼자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방콕이야 워낙 자주 들락거렸던 익숙한 곳이라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결정에 팀원들은 환호했고, 나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홀로 낯선 장소를 찾아 길을 떠났다.
하지만 의기양양했던 것도 잠시, 몇 년 동안 가보지 않은 사이 방콕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설상가상 나는 팀원들과 헤어지자마자 합류하기로 한 목적지도 까먹었는데, 심지어 그들에게 연락할 수 있는 핸드폰도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야할 역을 놓쳤고, 숙소 이름과 합류하기로 한 목적지도 모른 채 낯선 땅을 헤매기 시작했다. 게다가 밖에는 비가 엄청 쏟아지는 상황이었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습관처럼 뒤적인 바지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가 잡혔다. 그건 바로 1,000 바트짜리 현금뭉치와 비자 카드. 내 손에 돈과 카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공포와 두려움이 정말 한순간에 싹 하고는 사라졌다. 갑자기 여유로운 마음으로, ‘긴장하고 여기까지 오느라 목이 마르니까 일단 수박을 하나 사 먹을까?’하며 옆에 있던 시장으로 들어가 수박을 골랐다. 일단 수박을 먹고 나면 택시를 잡을 생각이었다. 택시를 잡아타면 핸드폰 대리점이든 호텔이든 대사관이든 어디든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안도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돈이란 건,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불행을 막아주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점을 꿈에서 나마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불행은 막을 수 있지
서점원의 기묘한 휴일 꿈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