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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play Jun 06. 2024

낭만 4 ξ 밟고 온 길을 다시 밟고

화를 삭이며 걷기

부정적인 마음과 기분에 휘둘리는 건 피곤한 일이다.
발끈하는 순간, 몸과 마음은 불덩이가 된다.


지난 주말, 대화 중에 발끈했다. 마음을 달래려고 설거지를 해 봤다. 쏟아지는 물줄기와 쟁그랑대는 그릇 소리에 숨어 씩씩댔다. 그러고도 마음이 안 풀려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는 우리 집을 지나 쭉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걸 기다리다가는 화가 더 오를 것 같아서 비상문을 열었다. 온몸을 이고 진 발바닥이 툭툭 계단으로 떨어진다. 마음도 뚝뚝 떨어진다.


일 층에 도착해 방향도 잡지 않고 걸었다. 걷다 보니 이왕이면 목적지가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 멀리 보이는 경륜장 지붕을 별 삼아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잘 모르고 들어선 길은 신축 공사로 정돈이 안 된 임시 보행로였다. 벽돌이 깔리지 않은 바닥에는 종이를 짓이겨 만든 듯한 어지러운 천이 깔려 있었고, 바로 옆 4차선 도로에서는 자동차들이 씩씩대며 달렸다. 


도로와 인도가 얼마나 가까운지 열린 차창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가 귀에 닿기도 했다. 물론 문장의 일부였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소란하고 잘 들리지도 않는데 ‘한 번 소리라도 질러볼까’ 하는 마음이 불쑥 들었지만, 그럴 거면 산으로 갔어야 했다. 내 마음만큼 복잡한 곳으로 와 버리다니. 위험하고 어수선한 사이로 답답한 먼지가 풀풀 날렸다.


고개를 돌리면 공사장이었다. 가림막이 2단으로 설치돼 있고, 그 너머에는 다져놓은 흙바닥과 공사 장비들이 보였다. 곳곳에 쌓여 있는 원통은 속이 비고 넓어서 허전해 보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공사장 주변에는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길이 끝나길 기다리며 다시 어지러운 바닥을 보니 열심히 내딛는 운동화가 바쁘다. 와중에 대충 묶여 늘어진 신발 끈이 보였다. 고쳐 매고 싶어서 쪼그리고 앉아 끈을 조였다. 깔끔해진 운동화가 겨우 볼 만해졌다.


공사장 구간이 끝나자, 뒤편으로 넓고 깨끗한 길이 나타났다. 잘 꾸며놓은 산책로였다. 뜻밖의 행운이었다. 산책로 옆으로는 작은 도서관과 어린이집이 있었다. 아이들이 심어 놓은 방울토마토와 상추를 구경하는데 건물 옆으로 샛길이 보였다. 바닥에는 네모난 돌이 한 줄로 쭉 놓여 있고 그늘진 가장자리에는 키 작은 풀이 소복이 자라고 있었다. 돌다리를 밟고 따라가 보니 놀이터가 나왔다. 그제야 볕도 들지 않는 샛길에 돌다리가 놓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순간 비밀 장소를 찾은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아무도 없는 뜨거운 낮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들뜬 마음으로 되돌아 나와 산책로를 걸었다. 바닥에 깔린 정사각형의 벽돌은 모래사장처럼 반짝거렸다. 파란 하늘, 선명한 새소리와 나풀거리는 나뭇잎들. 끝까지 걸어가면 바닷물과 닿아있을 것 같은 길이었다. 마음에 드는 길을 구석구석 걷는 사이, 기분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감정의 긴장이 풀리니 드는 생각은, ‘다 같이 오면 좋겠다.’였다.


한참을 걷다가 뜨거운 나무 의자에 앉아 양쪽을 번갈아 본다. 더 가자니 슬슬 집 생각이 나고, 돌아가려니 아쉽다. 내리쬐는 햇볕에 목덜미가 따가워 자리를 옮긴다. 더운 날이었다. 드디어 오늘의 햇볕이 뜨겁게 느껴지는 걸 보니 화가 좀 누그러진 걸까?


어느 쪽으로 더 걸을지 고민하는데 무언가 벤치에 똑떨어진다. 뒤를 보니 얇은 잎이 달린 나뭇가지가 머리끝에 닿을락 말락 늘어져 있다. 여러 장의 나뭇잎 사이로 흰색에 가까운 작은 꽃이 보였고, 길게 뻗은 암술에는 아이 손톱만 한 열매가 달려있었다. 아마도 이게 벤치로 떨어진 모양이다. 나뭇잎과 꽃을 지붕 삼아 자라는 열매를 보니 다시 집 생각이 난다. 자꾸 생각나는 걸 보니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


‘그래, 밟고 온 길을 다시 밟고 집으로 가자.’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났을 때 멀리 걸어갔다가 돌아오며 화를 삭인단다. 나도 그들처럼 돌아가보기로 한다. 돌아가는 길에는 올 때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뜨거워 놓쳤던 것들을 다시 보고 생각하기로 다짐한다. 


되돌아온 임시 보행로에서는 힘을 주어 걸었다. 비포장된 길은 울퉁불퉁하니 산길 같기도 했다. 구멍 뚫린 원통 대신 산처럼 쌓인 자갈에 눈길을 주었고, 높이 올라간 건물의 꼭대기를 올려다봤다.

전과는 다른 것들을 보고 걷는 동안 집이 가까워졌다. 모르는 길은 길게만 느껴지더니, 알게 된 길은 짧기만 하다. 반가움과 조급함이 뒤섞인다.


‘아직 다 삭인 것 같지 않은데.’


버스정류장에 앉아 한 번 더 신발 끈을 고쳐 맨다. 걸어가야 할 길은 뜨겁게 익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음을 누그러 뜨리고 일렁대며 걸어가 보기로 한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 없는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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