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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play Jun 13. 2024

낭만 5 ξ 틈을 메우는 딴짓

생활인에서 쓰는 사람으로 건너가기

글을 쓰려고 의자에 앉는다. 직전에 뭘 했냐면 식탁에 놓인 과자 봉지를 줍고, 세탁물을 건조기에 넣었다. 생활인에서 ‘쓰는 사람’으로 모드를 전환할 때는 둘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 틈을 잘 붙이려면 딴짓이 필요하다. 가장 손쉬운 딴짓은 유튜브에 들어가 노래를 듣거나, 짧은 영상들을 보고 넘기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보고 피식거리다 보면 현실과 잠깐 멀어진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딴짓인데, 정신을 잃는 경우가 생겨서 피하는 편이다.


가장 생산적인 딴짓은 밥을 먹거나 산책하는 것이다. 내게 밥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 치르는 의식이자 시간의 경계이다. 밥은 거창하게 먹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점심한테 발목 잡힐 수 있으니 한 끼 정도는 빵이나 요플레를 후루룩 마시는 걸로 끝낸다. 틈이 메워졌단 생각이 들면 딴짓을 멈출 장소를 찾는다.


자주 찾는 곳은 빠른 걸음으로 15분 걸리는 도서관이다. 인도와 신호등을 따라 멈췄다가 다시 가길 반복하며 건물로 나뉜 골목 사이를 걸어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산으로 둘러싼 풍경이 펼쳐지면 거의 다 온 셈이다. 마지막으로 도로를 끼고 섬처럼 자리한 장미정원을 휘돌아 가면 도서관이 보인다.

도서관은 건물 뒤편과 확실히 모드가 달랐다. 방금 전까지 지나온 아파트와 온갖 체인점이 사라진 풍경은 갑자기 여행지에 뚝 떨어진 듯 올 때마다 신기했다. 도심에서 도서관으로 ‘진입한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타일 조각으로 꾸며진 기둥을 지나 긴 계단을 거쳐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차갑고 쨍한 대리석이 깔린 로비에는 마른 종이 냄새가 빈틈없이 퍼져있었다. 책이 된 기분으로 열람실에 들어가 창가를 마주하고 앉는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블라인드가 출렁거렸고,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얼굴을 간지럽혔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뒤, 마른세수를 마친 손을 턱에 괸다. 눈을 끔뻑이고 있는데 창밖으로 길 건너 고등학교 운동장이 보인다. 네모난 운동장 바닥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둘레에는 엉성한 나무와 촘촘한 나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남는 공간에는 빨간 장미가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초록 사이에서 더 눈에 띄었다.


이제 나도 몸을 기울여 내 것을 들여다본다. 며칠간 쓰다만 글 중에 장미만큼 눈에 띄는 글을 골라 완성시켜야 했다. 밥도 먹었고, 도서관에 오며 산책도 했다. 새로운 장소에 왔으니 ‘쓰는 사람’으로 건너가 본다.


다시 고개를 든다.

창밖이 보인다.

...

계속 본다.

‘틈을 덜 메웠나?’ 무사히 건너가기에 실패한다.


도서관 창문은 참 크고 깨끗했다. 도서관을 둘러싼 여름산이 또렷하게 보였고, 모른척하기에는 눈이 너무 여렸다. 바람은 우거진 나무 사이로 파고들어 색색의 나뭇잎을 흔들었다. 햇빛이 더해지니 수풀은 여러 빛깔의 조각을 붙인 모자이크 같았고, 일렁이는 물결과 닮아 있었다. 두 눈으로 마주 보기엔 너무 시린 햇빛을 나뭇잎에 비춰 한동안 바라봤다.


그때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악기 소리가 들렸다. 이왕 시작된 딴짓을 이어가기로 하고 열심히 관찰한다. 운동장 가운데에 피아노와 드럼, 마이크 거치대가 놓였고, 기타를 맨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관람객들은 무대를 향해 반원 모양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학교에서 작은 축제를 여는 모양이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창밖을 보고 있는데 관리자가 창문을 닫기 시작했다. 닫힐 때마다 소리가 아득해지더니 뚝 끊겼다.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어서 가방을 챙겨 창문이 열린 2층 열람실로 내려가 숨은 관객이 된다. 곧 창문으로 어리고 여린 목소리가 들어왔다.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중2 때까진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도서관은 처음이었다. 보컬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어깨를 양옆으로 나풀거렸다. 공연을 하는 사람도, 손뼉 치는 관객도 모두 햇빛 아래 반짝였다.


몇 팀의 공연이 더 이어지고 나서 축제가 끝났다. 갑자기 꿈에서 깬 듯 시간이 궁금해졌다. 가방을 열어 주워 담은 것들을 다시 꺼냈다. 도서관에 온 지 한참 됐는데, 쓰고 고쳐야 할 글이 그대로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아래 내 글도 반짝일까 싶어 유심히 본다.


안 되겠다. 오늘은 꽤 낭만적인 딴짓을 한 것 같으니 새로운 글을 써야겠다.

타닥타타타닥. 타다다닥.


한참 뒤, 조용한 학교 운동장에 아마도 수업의 끝을 알리는 짧은 음악이 울려 퍼졌다.

조용히 가방을 멘다. 나도 오늘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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