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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쩔기자 Jul 27. 2022

재벌,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

[산업부 어쩔기자 일지⑩]

"기자님~"


오전 8시. A기업 홍보부한한테 전화가 왔다. 불길하다.


"오늘 OOO 행사가 있는데, 사진 기자 대기해야 할 것 같아서. 혹시 말 안해줬다고 내 탓할까봐."


오늘은 발제도 안하고 취재아이템만 슬쩍 내서 한가롭게 보낼 참이었다. 이럴 땐 꼭 뭔가 일이 생긴다. 개똥이 홍보 부장의 뉘앙스가 OOO 행사에 그룹 오너가 올 것 같다는 말이다.


10년 넘는 기자생활 중 7년동안 기업을 출입하며 느낀바, 산업부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기사는?


기업 비리를 캔다? 사회부성 기사다.

기업의 재무재표를 뜯어본다? 증권부성 기사다.

오너와 유명 연예인의 열애설을 쓴다? 문화부성 기사다.


그렇다면 대체 산업부 기자는 무엇을 중요하게 다루는가.


재계 총수의 '한마디'다.




재벌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의 특성상, 그룹 오너의 한 마디는 그룹의 전체 방향성을 결정짓는 무게를 가진다. 그말인 즉, 그룹 오너가 어디에 등장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지 모르기 때문에 대기해야 한다는 말! 전문용어론 '뻗치기'다.


산업부 기자는 오너가 등장하기 직전 로비에서, 길바닥에서, 행사장에서, 장례식장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아깝게 생각해선 안된다(고 교육받았다). 느낌상, 아무 말도 할 것 같지 않은 날도 있지만 그래도 오너가 어딘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 앞에서 대기해야 한다.


왜?


개똥이 기자도 기다리고 소똥이 기자도 기다리고 말똥이 기자도 기다리니까!


이런 생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뻗치기를 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대체 난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OOO 행사장. 이미 취재기자들과 사진기자들이 빼곡하게 대기하고 있다. 1시간 후, 오너가 등장하고 카메라 기자들의 셔터가 번쩍번쩍 터진다. 그룹 오너는 입을 굳게 닫고 빠른 걸음으로 행사장 안으로 들어간다.


30초만에 상황 종료!


아, 난 대체 왜 이곳에서 그를 기다렸던가.




"행사는 4시간 후에 끝납니다! 대기하실 분은 대기하시고!"

개똥이 홍보 부장이 큰 소리로 말한다.


하, 또 대기라니. 대기하고 나면 퇴근 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긴단 말입니다.

대휴를 주장하기도 애매한 근무초과 시간.


주변을 둘러본다. 몇몇 기자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대기할 참인가보다.


'에라, 모르겠다!'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이럴 땐 위치 보고를 해야 할 윗 선배가 없는게 다행이다.

밖으로 나오자 햇볕이 따사롭게 비친다. 눈 앞에 있는 높은 건물, 뜨거운 태양이 반사돼 눈이부시다. 방금 전 순식간에 지나간 재벌 소유의 건물이다.


네 입에서 한마디 들으려고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넌 내 마음도 모르고 휙하니 지나갔구나.

네 뒤꽁무니 쫒아다니려고 기자된 건 아니었어.


인생 참 불공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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