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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가지 못해도 괜찮지 않나?

#불안장애

by 송송당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일들이 대충 마무리 되었다.


창업을 하기로 한 팀원들과는 헤어졌고 입사도 확정했다.


약간의 시간이 남아서 1박2일로 제주도에 온 참이다.


한라산에 가는 것만이 목표여서 일정을 길게 잡지 않았다. 지난 봄 여행에서도 백록담에 가보고 싶었지만 날씨 때문에 실패했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라는 마음으로 나섰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새벽 첫차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해 제주공항에서 8시40분행 성판악 버스를 탔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성판악 대피소 관리자에게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11시 반에 도착하셔야 백록담에 가실 수 있어요'라는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나의 완벽한 여정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출발시간은 9시 반, 2시간이 남았다.

(안전상의 이유로 진달래밭 대피소 진입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진달래밭 대피소는 백록담 바로 아래다)


처음엔 그게 가능한 줄 알고 전속력으로 걸었다. 주변에 나말고 산악회에서 온 아저씨들도 그래보였다. 그런데 표지판의 지도를 보니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도저히 2시간 안에 주파를 못하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몰려왔다. 난 더군다나 등산할 때 걸음이 느린데 빠르게 걷느라고 숨도 제대로 못쉬고 있었다.


결국 백록담은 포기하고 정상인 백록담 가는 길에 있는 사라오름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그제서야 한라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피톤치드도 듬뿍 맡고 고요함을 즐겼다.


물론 시끄러운 등산객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어떤 남성은 배우 정우와 정확히 똑같은 사투리를 써서 재밌었다.


목포에서 수학여행 온 남자 고딩들은 거의 뛰어다녔는데, 한 친구는 다쳤는지 선생님 두 명과 함께 갔다. 선생님들에게 까불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사라오름에는 물이 없었고 전망대에는 구름이 껴서 멋진 풍경까진 못봤지만 너무 귀여운 야생 노루를 봤다.


내려오는 길은 어째 올라가는 길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길이 돌투성이라 발이 시큰거렸다. 내려올 땐 너무 힘들어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그래도 돌아보려고 노력은 했다.


아, 이 얼마나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인가.


왜 주어진지도 모른 목표라는 것에 사로잡혀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도 모르고 노동처럼 사는 삶.


그게 아니라 실현 가능한 목표를 잡고 즐기며 올라갈 때 등산은 훨씬 즐거웠다.


오랜만에 지금 이 순간 내 삶을 보았다. 백록담이라는 목표에 다다르지 않아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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