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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색가방 Oct 15. 2020

실존 인물에 대한 예의

- 신인 시나리오 작가 집필 일기, 열 번째 질문 -

“올바름, 그 기준에 대해서”
계속 기차가 움직이는 철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영화 시나리오를 기획하며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실존 인물에 대한 예의에 대한 부분이었다. 인터뷰가 가능한 시대를 살아오신 분이 아니기에 그 인물의 행동만으로 그 인물의 심경을 추측해야 했다. 그 사람은 대체 왜 그랬을까, 그 질문은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내게 붙어있던 질문이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보도, 선택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마음을 듣고 싶었다. 단순히 추측하기에 그 인물은 굉장히 복합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난 더욱 신중하고 싶었다.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한 한국영화 중에 제일 유명한 영화는 <자전차왕 엄복동>이 아닐까 싶다. 해당 영화의 블라인드 시사회에 초대되어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CG처리가 완벽하게 되지 않은 한 80% 정도의 완성도를 지닌 시점에서 보게 되었다.) 보고 내 의견을 설문지에 담았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많이 남는 영화였지만, 개봉 이후 불거진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실존 인물을 ‘미화’했다는 논란이었다. 그렇다. <나랏말싸미>의 논란도 그러하였듯이 실존 인물,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할 때는 미화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이는 영화의 완성도 그 이전에 그 해당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다면 그 인물을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방향성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점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어려운 지점이다. 주인공이 관객들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 있으려면 그 인물은 한 가지로 해석하여 그에 맞는 서사를 쌓아줘야 한다. 한 인물에 대해 이리저리 해석이 오고 간다면 그 캐릭터의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악역도 생각해보면 나쁜 짓을 했어도 그 이유가 뚜렷하거나, 신념이 확실하다. 이리저리 이유가 흔들리거나 신념이 바뀌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실존 인물, 역사적 사건의 모티프는 정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단순히 창작의 자유만을 외치기엔 미디어의 힘이 크지 않은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그렇지만 그만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모양이다.

그래서 나 역시 창작자의 입장에서 내가 다뤄야 하는 실존 인물에 관한 기사와 기록을 살펴보며 그 실존 인물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드러낼 수 있게 노력했다. 그 인물이 논란에 휩싸이는 내용을 최대한 담백하게 풀면서 동시에 숨기지 않았다. 어설프게 숨긴 잘못은 그 인물에 대한 논란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후에 영화사의 피드백에서 주인공을 더 포장해줬어야 했다는, 그 약점을 공개하면서도 강점이 더 두드러지게 표현했어야 한다는 내용을 들었다. 사실, 작가가 주인공의 장점을 마구 말해주지 않으면 그 인물을 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은 사그라든다. 주인공인 그 인물을 보호하고 싶으면서, 그 인물의 논란을 끌어내야 하는 그 과정이 작가로서 중심을 잡기 참 어려웠다. 과연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어떻게 시나리오에 담아내면서 실존 인물의 삶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지, 그 고민은 내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완성한 이후, 나는 두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더 수정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한 번 더 그 인물에 도전하게 된다면, 꼭 잘 그려내고 싶다. 그냥 잊히지 않길 바라고, 그 인물의 삶에 대한 조명이 한 번쯤 다시 되길 바라면서, 후폭풍을 견딜 수 있고 매력적인 주인공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연륜이 쌓이면 다시금 도전하고 싶다.


이렇듯, 역사적인 소재를 창작의 범주로 끌고 온다면 이러한 고민이 함께한다. 창작의 자유인지, 역사의 완벽한 고증인지, 여러 가지 가설 중에서 어떠한 것을 옳다고 정하여 개연성 있게 전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러한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더불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슈가 문화 콘텐츠 내에 꾸준히 등장한다.



예전, 땅에 대한 다큐필름을 찍은 적이 있다. 뿌리가 단단한 나무는 아스파트를 뚫는다.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표현을 처음 알게 된 건 3년 전, 친구와의 토론 과정에서였다. 종종 친구들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대체 그 표현이 무엇일까 했던 것이 요즘엔 문화 관련 기사에 꼭 빠지지 않는 표현이 되었다. 이 표현은 오래전에 등장했지만 최근 문화 콘텐츠에서 더욱 중요한 포인트가 된 것 같다. 흔히, ‘불편하다’라고 말하는 문화 콘텐츠 이슈들이 생기며 점차 창작 자체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이 지켜져야 한다는 일종의 선이 그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 선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작가님 대사는 다들 정중해요.”


PD님이 시나리오를 읽고 준 피드백 중 하나였고, 시나리오를 읽어보라고 주었던 친구도 왜 욕설이 등장하지 않냐고 말했다. 다 너무 착하게 말한다고 말이다. 이것이 사실 나 자신의 큰 약점이다. 갑자기 고백하는 것 같지만 실감 나고 구어체의 대사는 내가 가장 못하는, 가장 큰 약점 중에 하나다. 나름 선을 나누어 그 캐릭터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약하다는 것이 대체로의 평이었다. 강박 중 하나지만, 스스로 욕설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텍스트에도 스스로 욕설을 적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편이다. 이는 내가 쓰는 캐릭터의 범주를 한정하는 내 한계이기도 하다. (이 한계를 깨려고 일부러 욕설을 추가하는 과정을 거친다. ㅎㅎ) 이처럼 표현의 한계는 창작의 한계가 된다. 그렇기에 정치적 올바름이 많은 창작자에게 큰 이슈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창작자로서 가지는 가장 큰 목표는 즐거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 즐거움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으로 다가온다면 그는 과연 좋은 즐거움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표현에 제한을 걸 수는 없겠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불편함 없이 그 즐거움을 전달할 방법이 있다면 그를 선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 방법과 그 ‘선’을 어디쯤이다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참 모호하지만 신중해야 함은 필수적인 것 같다. 나의 글이,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거나, 과거의 아픔을 불러일으키거나, 역사나 사회 문제에 눈감는 글이라면 그것이 창작자로서 계속된 물음 속에 갇히는 길일 테니 말이다.



오늘의 질문

Q.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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