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109페이지에 달하는 시나리오 초고 한 편을 완성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시 일기 중에서)
작가들이 흔히 말하듯,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걸, 내가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순간을 정의한다면 ‘쓰레기 같은 초고, 내가 109페이지에 달하는 쓰레기를 완성했을 때,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좋았다.’라고 말할 것이다. 참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후련함과 함께 다가오는 찝찝함이라니...
초고를 어떻게 성장시킬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 시나리오는 마치 내 아이와 같아서(아이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무엇을 먹어야 잘 자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기술적인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시나리오를 이렇게 완성하면 내 시나리오의 문제점에 대해 내가 관조하면서 비판할 수 있다.
어떤 캐릭터가 붕괴되고 있지는 않은지, 중간 부분이 루즈하지는 않은지, 대사가 너무 많지는 않은지, 표현이 미숙하지는 않은지, 어느 사건이 이해가 안 되지는 않는지, 꼼꼼하게 다시 문제를 확인해볼 수가 있다.
이는 내가 시나리오를 완성해보지 않으면 발견해낼 수 없는 문제들이다.
존재했으나 눈에는 보이지 않던 나의 고질적 문제들,
쓰레기 같은 초고지만 그 문제들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 퇴고해야지 했던 나의 다짐은 수많은 수정 끝에 항복을 선언해버렸다.
포기는 배추 셀 때만 있는 거라지만, 포기하면 편하다. 내 생애 처음으로 고통스러웠던 수업을 짼 날... 마음이 편했다.
시나리오 초고 그 이후에 PD님과 회사에게 보여줄 시나리오는 수정 이후 시나리오를 보내기로 했었다. 시나리오 초고 완료가 1월 초, 회사에 보여준 수정고는 4월 말에 완성되었으니 퇴고만 4개월 가까이 붙잡고 있었다. 물론 퇴고는 촬영 때까지도 이어진다고 하지만, 초고를 끝냈을 때의 후련함이 그 잠깐이었다는 사실에 그 순간을 맘껏 누리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퇴고를 하며 PD님과 방향성을 계속 회의하며 장면들의 의미, 캐릭터들의 존재 이유, 대사 등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확실한 것은 ‘압축적으로 명료하게’였다. 그리고 동시에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선을 쌓아야 했다. 압축적이면서 감정선 쌓기라니... 제일 어려운 지점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해야 했던 것은 삭제다. 과감한 삭제. 페이지 수를 줄이고 많은 장면을 잘라내며 동시에 캐릭터들의 서사는 확고해져야 했기에 한 개의 장면으로 모든 감정선을 마무리할 킥이 필요했다. 매력적이며 서사는 한 방에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을 계속 찾아다녔다. 소품을 이용하기도 하고, 대사, 배경,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말이다. 또한 압축적으로 명료하게 퇴고하며 그 과정에서 없어지는 캐릭터와 내가 포기할 수 없었던 캐릭터들이 존재했고, 계속해서 토론과 설득이 이어졌다.
그 4개월이 가장 지치는 시기로 기억된다. 계속 갈아엎으며 뼈대만을 남기고 다시 살을 붙이고, 캐릭터들이 사라지고, 각 캐릭터들마다 분량을 조절하고,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답답했던 것 같다. 결승선을 모르고 달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오다가 결승선에 다다라서 계속 발목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가면 되는데...라는 생각이 가득 찼다.
그렇게 지쳐 있었기에 회사 측의 의견을 전달하신 PD님이 이 시나리오를 다시 수정해볼지, 아예 다른 작품을 시작할지 물어보셨을 때, 난 그만두겠다고 답했다. 놓아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계속 수정했는데도 새로운 길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면, 아예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70점에서 100점으로 점수를 올리는 것보다 0점이 70점으로 올리는 것이 훨씬 쉬울 테니 말이다. (지금 새로운 작품을 열심히 기획 중이지만, 힘든 것은 똑같다...ㅎㅎ)
벌써 가을이 왔다. 작년 봄에 시작한 계약은 올해 가을까지... 어쩌면 내년 봄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며, 그때 한 번 더 치열하게 수정해볼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재에 더 충실해야 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스무 살,
재수를 선택하지 않았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내가 선택했던 방법은
더 열심히 글을 써서 내 선택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스물다섯,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열심히 글을 써보는 것뿐이다.
오늘의 질문
Q. 과거의 선택을 후회해본 적 있으신가요?
p.s.
이 글을 쓸 때, 사실 굉장히 초심을 잃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계속 퇴짜 맞는 기획안들에 지쳐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글을 쓰며 다시 초심을 되새겼습니다. 제게 있는 선택지는 열심히 해보는 것뿐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열심히 했다면,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것은 제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어떠한 것일 테니 말입니다.
++ 이후, 에피소드엔 제가 수정하며 또 글을 쓰며 참고한 시나리오 작법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