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카포, 연주에서 다시 ‘처음부터’라는 뜻이다. 어릴 적, 음악 시간에 그 기호를 반가워했던가. 사실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악기에는 큰 소질이 없어서, 늘 잘하고 싶었지만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었다. 음악시간을 함께했던 리코더, 오카리나 등의 악기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참 버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D.C(다 카포를 표기하는 기호)는 후반부에 표시되어 있어서 끝날 때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몇 마디만 더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처음이라니 참으로 리코더를 부는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갑지 않았다.
사실 다 카포는 종종 찾아왔다. 이번 시나리오 작업뿐만이 아니라 내 삶에 있어서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했던 순간들은 늘 있었다. 예를 들어 보면, 예전에 하던 아케이드 게임에서 보스를 깨지 못했더니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고 해서 엄청 화가 났다. 대회 준비를 할 때도 그랬고, 과제를 할 때도 그랬고, 언젠가는 밤새 시험 준비를 하다가 한글 프로그램이 멈춰서 모든 것이 리셋되던 순간도 있었다. 대체로 무언가를 준비할 때, 늘 겪는 것이었다. 또는 무언가를 목표했을 때, 나에게 D.C가 찾아왔다. 그때 멈춰버리면 영영 그 노래의 완곡을 연주하지 못하듯이, 나는 멈추지 않고 다시 처음을 선택했다. 두 번째 도전하는 길은 조금 편했다. 보스의 숨겨진 필살기를 아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예 새로운 작품을 기획하겠다고 PD님께 말씀드린 이후에 나는 다시 글쓰기 기본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좀 더 기술적인 부분을 배우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일단 아카데미는 쉬운 문이 아니기도 했고 비쌌다. 나는 그래서 처음 극본을 쓸 때 읽었던 로버트 맥키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를 떠올렸다. 다시 작법서들을 차곡차곡 읽어갔다. 도서관에서 읽고 좋았던 책들은 구매도 해서 집에서 한 번 더 보았다.
이 기회에 이미 유명한 작법서들이겠지만, 한 번 소개해보고자 한다. 작법서들이 모든 정답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다면 엄청나게 도움이 될 경험담들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첫 번째 책, <시나리오 고쳐쓰기> 폴 치틀릭
이 책은 분량이 200페이지가 안 된다. 도서관에서 처음 읽을 때, 30분도 안 걸렸던 것 같다. 시나리오의 초고를 완성하고 수정 과정 중일 때, 일부러 찾아서 본 각색 작법서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 누가 작법서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제일 먼저 추천하고 싶다. 본 책이 해결책을 주었다는 의미라기보다 내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각색 가이드’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의 질문들을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쓰면 수정할 부분이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각색을 원하든, 이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든, 모두에게 추천한다. 본 책에서는 챕터 별로 과제들이 있다. 등장하는 과제들을 하나씩 수행하다 보면 내 시나리오의 빈틈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고쳐야 할 점을 찾고 싶다면 꼭 이 책을 추천한다.
두 번째 책, <SAVE THE CAT> 블레이크 스나이더
제일 유명한 책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다른 작법서들보다 제일 나중에 읽었던 책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 200페이지가량의 압축적인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시나리오의 전반적인 구조를 해결하기에 탁월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시나리오 고쳐쓰기>는 인물들의 감정선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의 코칭이 있다. 반면, 이 책은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구조, 이야기의 흐름을 굳건하게 잡아주는 힘이 있다. ‘블레이크 스나이더의 장 구분 용지 양식’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얄팍하게 기획안을 써냈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콘셉트와 화두 정도만 내 기획안에 보였던 것이다. 블레이크 스나이더를 따라 총 15개의 장을 정리한 이후라면, 그 이후 과정인 트리트먼트, 초고까지 단숨에 끌어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치고 싶다면 필수로 봐야 할 책이다.
세 번째 책, <시나리오 쓰기의 모든 것, 콘셉트/인물/대사와 액션> 마딕 마틴 외 다수
이 책은 구성이 좀 특이하다. 95명의 시나리오 작가들이 공개한 다양한 작법과 실전 연습 요령이 담겨있다. 각 작가의 파트 분량이 길지 않아서 약 36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지만 금방 금방 읽힌다. 1~2페이지마다 또 다른 작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가장 매력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모든 작법서엔 정답이 적혀 있지 않다. 작법서는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경험을 들려주어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명의 작가가 쓴 글은 그 작가가 보는 관점에서는 꽤 완벽한 글일지 모른다. 또는 어떻게 변주해야 더 매력적 일지 그 방법이 보이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하나의 시점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양한 작가들의 관점을 보며 내 시나리오를 다시 볼 수 있었고, 한 책으로 95명의 실전 연습 요령을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추천할 만하다. (본 책은 여러 주제로 나뉘어 여러 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장하고 직접 읽은 책은 ‘콘셉트/인물/대사와 액션’을 담고 있던 버전이었다.)
최근 <짧게 잘 쓰는 법>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이러한 문장이 나온다.
‘단지 저절로 나왔기 때문에 저절로 나온 문장을 영감의 결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는 오히려 영감이라는 관념을 버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감이라는 관념으로 인해 저절로 쓰이는 문장을 고쳐 쓰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수정만이 간직할 만한 문장인지 아닌지를 알려줍니다.’
그 문장에 뜨끔했다. 글을 수정하고 고쳐 쓰는 과정은 정말 중요하다. 단순히 영감이라는 이유로 그 문장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글 전체를 보고 가치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감이 온 듯, 저절로 적힌 문장이라도 모호하고 애매한 비유가 담긴 문장이라면 삭제하거나 수정해야 한다. 작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니 말이다.
이렇게 시나리오 관련 책들을 따로 모아두었다.
위에 소개한 작법서 외에도 <시나리오 넛셀 테크닉>, <시나리오 시퀀스로 풀어라>, <트라우마 사전>, <유혹하는 글쓰기> 등의 작법서를 읽으며 나의 처음으로 돌아가 기본을 쌓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고 나니 다시 처음에서 시작할 힘을 얻었던 것 같다. 사실 작법서에서 가장 많이 얻는 생각은 단 하나다. ‘얼른 글을 쓰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작법서만 읽으면 얼른 글을 쓰고 싶어 진다. 지금도 기획을 하며 난항에 빠져있지만 이렇게 작법서를 소개하며 다시 훑어보니 얼른 글이 쓰고 싶어 졌다.
얼른 Fine을 적는 날이 오길.
오늘의 질문
Q. 여러분들의 인생 작법서는 무엇인가요?
p.s. 작법서와 함께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시나리오, 대본집 등을 읽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시중에 판매된다는 것 자체로도 그 시나리오와 극본이 좋은 사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죠. 도서관에서 빌려보거나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의 대본집, 각본집을 종종 구매하고는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읽으며 극본의 형태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책은 노희경 작가님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대본집이었습니다. 작법서에서는 미처 다 보지 못한 사례집은 꼭 대본집을 통해서 채워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