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우리가 어디에 있지?”
단순한 질문이다. 보통 “여기가 어디야?” 정도의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영화 <라라랜드>(2016년)에 그 대사가 나온다. 두 주인공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대화 중에 미아가 묻는다. 우리가 어디에 있냐(Where are we?)고.
세바스찬이 지명을 얘기하자 미아가 정정한다. “내 말은 우리,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고(No, I mean we, where are we?)”
세바스찬이 대답한다. “우린 그저 표류 중이야(We're just...drifting.)”
<쉘부르의 우산>(1965년)의 리메이크나 다름없는 <라라랜드>의 유명한 대사다. 이 짧은 대화에서 우리(We)의 의미가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를 사랑으로 바꿔도 크게 문제 있는 독법이 아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를 설명하며 ‘즉자 존재[être-en-soi]’와 ‘대자 존재[être-pour-soi]’를 구분한다. ‘즉자 존재’는 자기 안[en]에 빠져있는 상태이고 ‘대자 존재’는 자기에 대해[pour] 반성과 지각이 있는 상태이다. 개념을 상세히 다룰 이유는 없고, 다만 사랑이 ‘즉자 존재’를 벗어나 ‘대자 존재’가 되며 시작한다는 얘기만 하고자 한다. 고정적 자아에서 열린 자아로 바뀌어야 사랑할 준비가 됐다고 하겠다. 나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 나 안[en]의 고립에서 탈출해 나를 누군가를 위한[pour] 존재로 탈바꿈할 준비를 해야 사랑에 뛰어들 수 있다.
<라라랜드> 대사로는 “Where are we?”를 “Where?”로 받아들인 게 ‘즉자 존재’, “We?”로 이해한 게 ‘대자 존재’ 발상이다.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어도 각자라면 두 사람은 그저 우연히 그 공간에 위치할 뿐이다. 반면 한 공간에 있으며 각자인 둘을 함께라고 인식한다면 ‘우리’라는 공간을 새롭게 구축하게 된다. ‘우리’라는 공간은 그리피스 공원 같은 지명을 넘어선다.
거기서 멈춰선 안 된다. 사랑은 고양돼야 한다. 고양되지 않은 사랑은 표류한다. 사르트르 용어를 계속 쓰면 사랑을 위해 ‘타자를 위한 존재(être-pour-autrui)’로 바뀌어야 한다. 함께인 각자만으론 사랑이 시든다. 서로가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서로를 ‘타자를 위한 존재’로 유발해야 한다. ‘타자의 시선(le regard d'autrui)’은 삶과 사랑의 준거로 매우 중요하다. 사랑은 기쁜 일이지만 품값이 많이 드는 일이다. 나를 ‘대자 존재’로 각성하고, ‘타자의 시선’을 예민하게 수용하며 ‘타자를 위한 존재’로 지양(Aufhebung)되어야 하기에 그렇다. 한쪽만이 아니라 둘 다 그렇게 되어야 하기에 사실 진짜 사랑은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기적은 포기되지 않는다. 인간은 기적을 꿈꾸는 종이다. 신이 인간을 설계하며 초월과 합일의 기적 열망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기적의 대표 항목이 사랑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불가능성의 선물이 사랑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사랑에 빠진 인간은 불가능한 선물을 가능하게 하려고 ‘불모의 열정(passion inutile)’을 쏟고 마침내 ‘무익한 수난(passion inutile)’에 떨어지기도 한다.
사랑이란 것이 도달하지 못할 신기루이지만 인생이란 사막에서 그 신기루 찾기가 중단된 적은 없다. 그것은 열정이자 수난이고 결국 기적이다.
이 책은 사랑에 관한 문제적 영화 22편의 성찰을 참고하며 사랑을 탐구한 일종의 사랑학 교과서이다. 좋은 영화는 좋은 성찰을 담는다. 그러한 성찰에 나의 생각을 추가해 좀 특별한 사랑학을 의도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랑학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을 기원한다.
안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