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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27. 2024

스테로이드를 때려 부은 쇠 맛 논스톱 로맨스

<러브 라이즈 블리딩(LOVE LIES BLEEDING)>

        

<러브 라이즈 블리딩(LOVE LIES BLEEDING)>이 재미있는 영화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극중에서 JJ 역을 맡은 데이브 프랑코가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다. 내가 로즈 글래스 감독을 좋아하는 이유는 절대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매 순간 흥분과 긴장에 휩싸이게 된다”고 말한 게 크게 과장은 아니다. 


이 영화가 그린 로맨스 또한 흥미진진하고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종류여서, 그래서 현실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모를 일이다. 현실에서 더 쇠 맛 나고 스테로이드 범벅인 사랑이 있을지는.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     


영화 제작사는 액션과 로맨스, 블랙 코미디와 퀴어, 범죄 스릴러까지 다양한 장르가 뒤섞인 영화라고 소개한다. 그렇다. 골고루 섞여서 각각이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게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작품의 주요 배경은 1980년대 미국 뉴멕시코이다. 그중에서도 무더위 아래 땀으로 얼룩진 허름한 체육관과 사막의 사격장에서 영화가 전개된다. 라스베이거스가 찬조 출연하나 감독은 지저분하고 적막한 사막 지대를 영화의 핵심 공간으로 고수한다.


시간 배경이 왜 1980년대인가. 글래스 감독은 “1980년대가 90년대를 뒤덮은 허무주의 직전의, 모든 것이 과잉인 궁극의 시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잉 혹은 거품이 정점에 달하면 무너지거나 터지는 것 말고는 다음 행로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1987년 민주화운동과 이어 87체제가 성립했고 다음해에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그 전과 후의 대한민국 역사가 완전히 달라진다.


세계적으로 1980년대는, 미소 냉전이 극한으로 치닫다가 1985년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된 후 타협을 길을 모색해 냉전이 막을 내린 시기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게 1989년이다. 1990년대는 정신사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가장 빈번하게 널리 사용된 시기였다. “90년대를 뒤덮은 허무주의”는 아마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는 듯하다. 두 용어가 같은 말은 아니지만,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관점이 얼마든지 가능해 보인다.


영화는 서부 사막의 석양인 양 모더니즘의 잔영을 후경으로 깔고 먼지를 일으키며 포스트모던한 질주를 감행한다. 보디빌딩은 메마른 질주의 현상이다. 레즈비언인 두 주인공 루(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잭키(케이티 오브라이언)가 보디빌딩을 매개로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이채롭다.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된 근육이 자연스럽게 여성성과 결합한다. 의미 없이 체육관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루가 갑자기 등장한 근육질 보디빌더 잭키에게 매료되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어 스테로이드가 등장하고 힘과 과시의 열망이 화면에 넘쳐난다. 사격장이 또 다른 공간인 것은 적절한 조합이다. 근육과 총은 결국 등가이다. 폭력성과 지배의 상징이기도 하다. <델마와 루이스>라든지 여성을 내세운 기존 퀴어영화에서 근육과 총, 폭력과 지배에서 벗어나는 대체로 평화로운 여성성을 그렸다면 <러브 라이즈 블리딩>에선 퀴어영화이면서 젠더와 무관한 폭력을 그린다. 성이 중요하지 않다. 모두 폭력에 익숙하고 평화에 둔감하다. 따라서 이 영화에 페미니즘이 장착되었다면 페미니즘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새로운 지평의 페미니즘이다. 남성이 악하고 여성이 선하다는 도식이 사라지고, 모든 인간이 악하다.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남녀평등이 구현된다. 사랑 말고 가치를 부여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글래스 감독은 “기존과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이 건강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유머가 가득한 펄프 느낌의 폭발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욕망과 치정, 복수, 폭력, 탈출 등을 이러한 연출 의도에 맞춰 거칠지만 섬세하게 표현했다. 유머를 기본으로 깔고 있어 관객은 과몰입하지 않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데이브 프랑코의 평가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어디로 튈지 모르게 연출하였지만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를 추구하진 않았다. 영화사(映畫史)의 유산을 영리하게 계승해 계산된 클리셰를 살짝 비틀어 웃음과 재미를 동시에 보여준다. 아주 낯설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꼬아 어그러지게 만들 때 관객은 열광하는 법이다. 사랑에서도 그럴까?     


자유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감독이 말한 펄프 느낌의 해피엔딩이다. 영화 결말 부분의 복수와 해방 장면에서 단연 스테로이드로 충만한 만화적 서사를 추구했다. 몇 년 전 파키스탄을 강타한 강우를 ’스테로이드 몬순‘으로 표현한 바로 그 느낌이다. 


엔딩 장면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폭력과 범죄로 그려진다. 형용모순이다. 영어로 ‘Oxymoron’으로 표기되는 형용모순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oxy’는 날카로운ㆍ예리한이란 뜻이고 ‘moron’은 저능아를 뜻한다. ‘똑똑한 바보’라는 의미이니 형용모순이란 어원 자체에 형용모순이 들어있다. 영화에서 ‘똑똑한 바보’는 루이다. 사랑에 빠져 바보가 되지만 사랑을 지키는 데는 똑똑해진다. 사랑의 이름 아래에서 형용모순은 전혀 형용모순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걸 넘어서고 정당화한다. 연인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극진한 사랑이다. 부친살해 코드가 가부장제 타파와 적당하게 어우러져 묘사된다. 신화소를 많이 드러내기보다 펄프적인 감각으로 형상화한 데서 다시금 감독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억압과 통제를 극적으로 돌파하여 자유와 사랑을 쟁취하는 결말은, 전통적인 할리우드 영화인 듯 아닌 듯 영화적인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열어놓고 끝낸 <델마와 루이스>의 유명한 결말 장면과 이 영화의 결말이 엉뚱하게 겹쳐지며 영화에서 다시쓰기의 묘미를 체감하게 된다.


루의 아버지로 사이코 범죄자 랭스턴을 연기한 중견 배우 에드 해리스가 “틀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철저하다”라고 글래스 감독을 평한 것은 대체로 수긍할 만하다.      

Love Lies Bleeding     


‘러브 라이즈 블리딩’이란 제목은 영화 제목으로 좀 어렵다. 영어권이 아닌 사람에겐 더 뜻이 와 닿지 않는다. 동시에 직관적으로 이 영화의 내용을 잘 파악하게 해주는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문법을 무시하고 순서대로 해석하면 ‘사랑, 거짓말, 피흘림’이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Sex, Lies, And Videotape)ㆍ1990년>를 떠올리면 가능한 해석이나 의미의 이미지로 염두에 둘 수는 있으나 맞는 해석은 아니다.


문법을 적용하면 ‘사랑이 피 흘리며 누워 있다’ 또는 ‘사랑이 피 흘리며 놓여 있다’ 정도의 의미이겠다. 아버지를 포함해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사랑이니 ‘Lies’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스럽지만 ‘Love’와 ‘Bleeding’이 완벽하게 연결되긴 한다. 그렇다고 ‘피 흘리는 사랑’ 식으로 받아들이면 감독의 의도에 어긋난다. 사랑이, 피흘림 또는 피흘림의 현상, 풍경, 나아가 맥락에 위치한 것을 영화가 표현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사랑이 무지막지하게 그려진 건 사실이다.   


사랑, 고통, 상실, 희생 등의 개념이 은연히 결부되는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꽃 이름이다. 우리 말로 줄맨드라미라고 하는 ‘아마란스(Amaranth)’란 식물을 세간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붉은색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는 모양이 마치 사랑이 피었다가 고통 속에서 시드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영화 제목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의미가 와 닿는 꽃의  별칭이다. 


그러나 영화와 관련해 시드는 게 꽃 별칭의 핵심은 아니다. 꽃말이 열정, 헌신, 시들지 않는 사랑, 불멸 등인 것으로 보아 고통스럽지만 승리하는 영원한 사랑을 표현한 것을 연출 의도로 보아야 한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대중음악가 엘튼 존(Elton John)의 곡명이기도 하다. 이 곡은 사랑이 무너지고 상처받은 마음의 상태를 묘사한다. 실연의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기에 사랑을 쟁취한 이 영화와는 다르다. 예컨대 “당신이 다른 남자와 같이 있다는 생각에 죽을 거 같아(Oh it kills me to think of you with another man)”는 가사는 동성애와 사랑의 질주를 구현한 영화의 풍경과 상반된다. 제목과 직접 연결된 가사는 다음과 같다.  

   

“사랑이 내 손에서 피 흘리고 있어(Love lies bleeding in my hand)”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사는 속도(pace)이다. “만일 내가 속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또 다른 하루를 마주하지 못할 거야(If I don't change the pace, I can't face another day)”라는 대사에서 적발함을 느낄 수 있다. ‘속도(pace)’는 함축적인 단어이다. 오늘이 세상에서 마지막 날이란 심정으로 사랑을 붙든다. 속도는 삶의 속도이자, 사랑의 속도이다.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마당에 속도(pace) 조절 같은 건 없다. 무조건 최고속도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최고속도로 달린다. 


엘튼 존이 이 곡에서 말한 속도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이 영화의 속도를 음악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대충 엘튼 존의 이 곡을 들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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