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지.”
영화 <아비정전(阿飛正傳)>의 유명한 대사다. <아비정전>은 장국영이 연기한 ‘아비’라는 사람의 이야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굳이 ‘정전(正傳)’으로 표현된 이야기이다. ‘정전’을 쓸 만한 인물이 못 되는 ‘아비’ 같은 인물에다 ‘정전’을 붙인 데서 상충과 분열, 어긋남이 목격된다.
주인공 ‘아비(阿飛)’의 이름에 ‘날 비(飛)’가 들어간 것이 어울리는 듯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대사 속의 새와 달리 극중 아비는 나는 시늉만 하다가 추락한 캐릭터이다. 아비를 연기한 장국영이 2003년 4월 1일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털 호텔 24층에서 투신해 <아비정전>의 대사처럼 생을 마감한, 영화 밖의 사건이 유감스럽게도 이 유명한 대사에 부합한다. 아비(阿飛)의 ‘아(阿)’가 언덕이란 뜻이어서 아비는 ‘언덕에서 날아오른다’가 된다. 대사나 이름이나 장국영의 마지막을 암시한 듯하다.
어긋남
1990년 개봉된 <아비정전>의 주제는 존재 혹은 사랑의 어긋남과 근원적 고독이다. 2003년 4월 1일이 지나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 이전에 영화를 본 사람과 다르게 <아비정전>을 느낄 것이다.
왕가위 감독 영화 세계의 청사진에 해당하는 <아비정전>은, 나중에서야 제대로 평가를 받았지 개봉 시점엔 실패한 영화였다. 데뷔작 〈열혈남아〉(1988)로 단박에 홍콩 영화계의 기린아로 떠오른 데 힘입어 왕가위 감독은 <아비정전> 제작사로부터 사실상 전권을 위임받아 당시 홍콩 영화계에서 잘 나가는 장국영, 장만옥, 유가령, 장학우, 유덕화, 양조위 등 6명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최소한의 설정만으로 배우들과 함께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전한다. 그러나 널리 알려졌듯, <아비정전>은 흥행에 참패하고 제작사 또한 망한다.
제작사와 관객은 <아비정전>에서 왕가위의 전작인 <열혈남아>와 같은 홍콩 느와르를 기대했지만, 실제로 탄생한 <아비정전>은 기대와 달리 서정적 ‘느와르’에 가까운 작품이어서 빚어진 참사였다. 한국에서 <아비정전>이 개봉한 날 영화 속에 액션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관객이 극장에서 소동을 피운 예화에서도 ‘느와르’의 어긋남이 확인된다.
영화는 삶의 고독과 서로 빗나가기만 하는 사랑의 감정선을 그린다. 어둡다. 그렇다고 아주 정색한, 거리조차 식별되지 않은 깊은 어둠이 아니다. 어슴푸레한 어둠이어서 더 섬세하게 다가온다. 절대 암흑은 어둠 자체를 포함하여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다. 볼 수 없음이 절대 어둠을 보게 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것은 신을 피휘(避諱)로만 호명한 유대교 관습과 비슷하다. 양가위식의 빛과 대비된 어둠은, 빛과 어둠의 비율에 따라 다양한 정조를 표현한다. 그 배합 양식에서는 대체로 슬픔이 누출한다.
많은 평자가 <아비정전>을 논할 때 영국령 홍콩의 중국 반환이라는 1997년의 국제정치 사건을 언급한다. 실제로 아비의 양어머니가 미국으로 떠나는 등 중국 반환을 앞둔 홍콩인의 불안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러한 지정학 배경 없이도, 오히려 배경을 지움으로써 <아비정전>을 더 잘 감상할 수 있다.
액션이나 사회성보다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슬픔과 소통불능에 영화의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아비와 아비의 양어머니 사이의 관계, 아비와 끝내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생모와의 관계. 이 두 관계가 아비라는 캐릭터의 후경으로 깔린다. 생모는 아들인 아비를 버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버린 게 아니라 양육비를 준다. 아비의 양어머니는 돈 때문에 아이를 키우지만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자신의 출생과 양육에 관여한 두 여인과 어긋남은, 연인으로 사랑한 두 여인과 관계에서 반복된다.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에게 구애해 함께 살지만,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그를 떠난다. 곧바로 댄서인 루루(유가령)와 사귀지만 아비는 이 관계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다리 없는 새처럼 떠돌기만 할 뿐이다. 대조적인 성격인 수리진과 루루가 양상이 다르지만 두 어머니처럼 아비를 휘감는다. 또 장학우와 유덕화가 연기한 두 캐릭터가 아비의 부유하는 삶에 일종의 조력자이자 선명한 대비로써 제시된다.
아비 주변의 두 남자는 아비의 두 여자를 사랑하지만, 두 여자는 아비만을 사랑할 뿐이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등을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이 영화에서 조용히 부서져 내린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어긋남과 관련되지 않은 인물은 막판에 느닷없이 나오는 양조위이다. 유가령의 남편인 양조위는 장국영처럼 멋을 내며 머리카락을 빗어넘기는 모습으로 영화 말미에 등장하여 〈아비정전〉의 결말을 맺는다. <아비정전>의 결말은 이 영화를 거론할 때 반드시 지적하는 내용이다. 왕가위 감독은 영화 결말부에서 그 전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양조위를 뜬금없이 출연시켜 그가 외출을 준비하는 장면을 약 3분 동안 보여주다가 엔딩크레딧을 올린다.
애초 2부작으로 기획한 영화여서 <아비정전>의 속편에서 양조위가 장국영의 바통을 이어받아 이야기를 끌어가게 한다는 구상으로 한 연출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기이한 엔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러나 이 엔딩은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성취를 이룬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죽은 것을 모른 채 이역 땅까지 그 남자를 찾아온 여자, 전화를 받을 사람이 떠난 뒤에 걸려온 뒤늦은 전화, 수미상관의 기차 창밖 정글 풍경, 그리고 죽은 아비를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의 싱싱한 양조위. 모든 것은 원으로 서로의 등을 노려볼 뿐이다. 서로 마주보는 인물이 없는 어긋남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데 양조위의 막판 뜬금없는 등장은 주효했고 의도하지 않은 화룡점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왕가위의 천재성을 언급한다면 그는 실수로도 의미를 남기는 사람이다.
아비와 수리진의 만남, 불모의 사랑, 그리고 마지막을 암시하는 정글장면으로 시작한 영화의 전편(全篇)을 설명하는 대사는 맨 앞의 ‘다리 없는 새’일 텐데, 아비는 마지막에 ‘다리 없는 새’의 새 관점을 제시한다. 즉 다리가 없어서 땅에 내려앉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게 문제임을 밝힌다. 그 이유는 ‘다리 없는 새’가 원래 죽은 새이기 때문이다. 노신의 소설 <아큐정전>의 아큐가 정신승리를 이야기한 것과 비교하면 아큐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허랑방탕한 아비이지만 그의 현실인식은 냉정하고 정확하다고 평가함 직하다. 아큐의 정신승리가 정신의 부재를 지시한 것과 달리 아비의 ‘다리 없는 새’는 포괄적 부재를 뜻한다. 액션영화를 기대한 관객에게 <아비정전>이 어쩌면 과한 처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족으로 아비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 열차에서, 유덕화가 장국영을 보고 “네가 새냐?” “왜 한 번 날아보지 그러냐?”라고 윽박지르는 장면. 유덕화나, 연출과 각본을 맡은 왕가위가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이 24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그 장면으로 혹시 죄의식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들이 모종의 죄책감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고 또 무관하게, 어긋남은 영화가 개봉하고 13년이 지나 기이하게 완성되었다. 어긋남의 완성이란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자기 파괴적 사랑
아비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의 문턱에서 늘 좌절한다. 그에게 사랑은 도피처이지 낙원이 아니었다. 도피처에서 영구히 머물지 못한다. 아비 인생의 결말처럼 그의 사랑이 덧없이 사그라든다.
살면서 목격하는 사랑 중에 아비의 사랑 같은 게 있다. 사랑에 기꺼이 뛰어들지만 사랑을 구하지 못하고 익사하고 마는 유형. 사랑의 결론이 항상 자기파괴로 치닫는 사람이 더러 있다. 더러 있는 게 아니라 많이 있는가.
왕가위 감독은 사랑에다 왜 고독을 맞물렸을까.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할수록 더 고독해지니까? 더 고독해지니까 더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더 사랑하니까 더욱더 고독해지는 걸까. 24층 높이의 고독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고 하여도 어쨌든 사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고독 너머에서 공감의 새 영토를 확보하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영화의 아비처럼 쉴 곳을 찾지 못해 하염없이 떠돌다가 지쳐서 사랑을 떠나거나 사랑에서 좌초하게 된다.
영화에서 말하듯 ‘1분의 사랑’은 영원의 사랑으로 승화할 수 있다. 이 말이 바람둥이의 작업용 진술이 아니라 진실이 되려면 공감이 필요하다. 전제는 이해가 아니라 공감이다. 사실 공감이 이해보다 더 어렵다. “어떤 사람을 모두 이해할 순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는 대사처럼 사랑에서 이해와 공감은 다른 지평에 위치한다. 공감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이해는 자신을 작동하는 것이지만 공감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서 시작하고 지탱된다.
자아 내면의 결핍을 물어뜯고 사는 사람이라면 둘이 만들어낼 공감의 풍성함에 지레 겁을 먹고 차라리 자기를 서둘러 파괴하는 도피 혹은 광기로 귀의한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어떤 이들이 그런 고독하고 비겁한 사랑도 사랑의 족보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그런 사랑이 때로 더 아름다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