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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27. 2024

선상 난간에 걸친 여자 다리 사이로 햇살이 비췄다

<연인(L'Amant)>

 


장 자크 아노가 연출하고 제인 마치와 양가휘가 주연한 <연인(L'Amant)>은 원작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동명 소설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이다. 프랑스 문단에서 확고한 입지를 지닌 뒤라스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게 작가의 노년에 해당하는 1984년이고, 영화로 만들어진 게 1992년이다. 영화가 나오고 4년 뒤에 뒤라스가 세상을 떠났다.


소설 <연인>의 최초 표지는 글자만으로 단순했지만, 1985년판에 뒤라스의 어린 시절 사진이 들어갔고, 영화가 나온 뒤에는 주연 배우 제인 마치의 얼굴이 들어갔다. 작가의 삶과 소설이 혼융하고 이어 영화와 소설이 합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뒤라스는 ‘누보로망’의 대표 작가여서 소설 <연인>에 시제와 시점의 뒤섞임이 나타나고 비선형적인 구성이 관철되어 소설을 두고 다소 난해하다는 평이 있다. 영화는 소설의 플롯을 선형적 시간 흐름과 1인칭 화자의 전통적인 플래시백으로 바꾸어서 관객의 접근성을 강화했다. 영화가 시작하며,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노작가의 플래시백이 시작되는 시점에 카메라는 작가 책상 위의 사진을 비춘다. 관객은 상상하지 못했을 텐데, 1985년판 표지에 들어간 어릴 적 뒤라스의 사진이다. 원작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와 감독의 유머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랑을 사랑하다     


사랑에 관한 영화이긴 한데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사랑이 영화를 채운다. 우선 정신분석학에서 좋아할 만한 전형적인 관계가 영화와,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뒤라스의 삶에서 펼쳐진다. 아버지의 부재는 기본값이자 모든 관계의 출발점이다. 


모녀 관계에서 모성의 부재가 눈에 띈다. 모성이 없는 게 아니라 딸에 대해서만 그렇다. 아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큰아들에 대해서는 뜨거운 모성이 확인된다. 어머니와 장자 간에는 연인 사이를 방불케 할 긴밀한 사랑이 목격된다. 영화나 소설이 아니어도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장자와 어머니 사이는 현실에서 남다른 법이다. 


큰오빠가 비록 아편쟁이이지만 부재한 아버지의 권위를 행사하려 한다. 아버지 역할을 하는 큰오빠하고 제인 마치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성적인 긴장이 제시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신화소로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동시에 배치한다. 근친상간이 실제로 다뤄진 게 아니라 영화의 결을 형성했다는 얘기다.


작은오빠에 대해서는 제인 마치가 엄마가 된다. 상실한 남편을 대신한 큰아들에게 어머니가 사랑을 집중하는 사이에 제인 마치는 엄마를 대신해 작은오빠를 보듬는다. 그렇다면 제인 마치는 어디에서 자신을 사랑할 사람을 찾아야 할까. 양가휘다. 양가휘에 대해서 제인 마치가 아가가 된다. 사랑할 때 흔히 ‘아가(baby)’라는 표현을 쓰지 않나. 그렇다고 ‘아가’가 연인 관계에서 고정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사랑에서 연인이 단일 정체성일 때가 드물다. 양가휘가 제인 마치를 목욕시켜 주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1986년)에서 로버트 레드포드가 메릴 스트립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영화에 나오는 사랑의 풍경으론 이 장면 또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영화 밖의 이야기를 잠깐 하고 가자. 제인 마치의 현실인 소설가 뒤라스는 66세인 1980년에 35살 연하의 앙드레아를 만나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을 연인으로 지냈다. 소설 <연인>을 쓰는 동안 실제 뮤즈가 따로 있었던 셈이다. 이 관계에서도 연인이 단일 정체성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근친상간적인 (영화의) 플롯과 (현실의 소설가) 삶이 계속 뒤엉킨다. 제인 마치(어린 뒤라스)가 그 뒤엉킴 속에서 무엇인가를 향해 나가지만 무엇으로 향하는지가 불확실하다. 떠남은 영화의 결말이 된다. 영화는 무엇으로 가는가가 아니라 무엇에서 벗어나는가를 주로 그린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이 ‘부터(from)’만으론 안 되고 ‘로(to)’가 있어야 하기에 영화 속 소녀는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모색하는 데엔 실패한다. 뭉뚱그려 사랑을 향해 나아갔다고는 말해도 되겠다. 사랑이란 게 신기루여서 때로 방향 없는 전진이 된다.     

사랑의 시작

 
 <매혹당한 사람들(The Beguiled)>(1971년)은 돈 시겔이 연출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로, 이스트우드가 주연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초영화다. 소피아 코폴라가 2017년에 같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는데, 두 영화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여자의 성을 그리는 방법이다.


<매혹당한 사람들> 1971년작에서는 시겔 감독이 등장한 여자들의 성욕을 일일이 다 설명해준다. 이 여자는 왜 주인공 남자 이스트우드에게 끌렸는지, 저 여자는 왜 발정 상태가 됐는지 등 근거를 하나하나 첨부한 반면 이스트우드의 성욕은 설명하지 않는다. 남자의 성욕은 주어진 것으로 본다. 코폴라의 2017년작에선 남녀 간에 성욕 기제가 다르게 작동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성욕과 사랑은 인간에게 본원적이다. 사랑하는 데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왜 사랑하는지를 이리저리 따져볼 수는 있지만, 끝까지 따지면 사랑하는 이유로 사랑밖에 안 남는다. 사랑의 제1 원인은 사랑이니까.


제인 마치의 사랑을 설명하는 방법론은 코폴라에 가깝다. 여자 성욕의 원인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15살반 나이 어린 여자의 성욕과 사랑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묻지 않는다. 일종의 현실도피라는 상투적 설명이나, 극중 소녀가 성적으로 성숙한 애라서 즉 시쳇말로 ‘까진’ 애라서 그렇다는 식의 설명은 유치하다.


원래 사랑이란 게 준비가 돼 있으면 갑자기 시작하는 법이다. 극중 제인 마치처럼 몸에 불같은 걸 하나 가진 여자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적당히 건조한 환경과 나무라든지 인화 물질이 갖춰지면 언제든지 불이 붙을 수 있다. 어느 봄날 꽃이 갑자기 피듯 사랑은 느닷없이 터진다.


그러나 이 사랑은 분명 사랑이지만, 온전히 대상에 몰입한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을 사랑했고 사랑하기를 사랑했다고 할 극중 제인 마치/뒤라스에게 사랑은 2인칭을 호명하지 않은 1인칭에 머물렀다. 벌과 나비를 맞이할 생각이란 전혀 없이 오직 하늘을 향해 제 몸을 한껏 펼쳐버린 꽃처럼.


한데 사랑은 상호대상화이자 그 과정이다. 상호대상화에 따르는 불편함과 구차함 같은 것들을 무릅쓰면서 어쨌든 둘이 공존할 뭔가 다른 틀을 모색하는 과정을 사랑이라고 해야 한다.


<연인>의 여주인공은 사랑을 사랑하고 사랑하기를 사랑할 뿐 그에게 사랑하는 대상이 없다고 보아 무방하다. 대상과 무관한 자신만의 불꽃이 있기에 상대방이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에게 상호대상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어린 창녀


 누구에게 속박되지 않는, 성적으로 미숙하지만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그리고 자기 안에 불꽃을 가진 소녀가 스스로를 창녀화한다.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서 중국인 양가휘와 맺은 관계가 프랑스 소녀에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끊임없이 유발한다. 소녀는 이 관계에서 상대를 호명하지 않고 홀로 자신을 계속 태울 뿐이다. 양가휘도 마찬가지로 그 갈증에 시달리면서 내면에서 고통을 불러낸다. 둘은 감히 상대에게 눈을 돌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고통의 작가라고 하는 뒤라스의 관점이 영화에 반영됐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대 배경을 따져보면, 관계의 고통과 갈증은 이들이 경계인인 데서 비롯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가난한 백인 소녀와 중국인 대자본가의 아들이 만난다. 제인 마치뿐 아니라 양가휘도 경계에 서 있는 존재이다. 영화에서 몇 차례 언급되듯 그는 베트남 남자가 아닌 중국인 남자다. 당연히 프랑스 남자도 아니다. 두 사람 모두 본향을 떠나서 ‘경계례’(Borderline Case)로 서로를 만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가 메콩강을 건너는 배 위였다는 사실이 경계례를 시사하는 근원적 풍경이다. 이들의 사랑은, 이방인이 아니지만, 이방인이 아닌 것도 아닌 ‘유사’ 이방인끼리의 사랑이 된다.


제국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프랑스 등 본국에서 식민지로 나가는 사람 대부분이 본토의 과잉 인구였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폭민으로 표현한 이 사람들은 본토에서 환영받지 못하다가 식민지가 생기면서 그리로 밀려 나간다. 본토에서 쓰레기였지만,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들에게 엄청난 기회가 생긴다. 피부색, 즉 피만으로 조건 없는 우월성을 주장할 상황이 주어진 듯했지만, 식민지에서도 피보다 돈이 더 강력했다. 제인 마치 일가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인으로 내세울 우월감을 가난으로 잃어버린 터였다.


자본의 과잉이 국경을 무너뜨린 제국주의 시대에서 하얀 피부색의 인간이 백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과잉 자본에 연루되어야 하는데 제인 마치가 연기한 주인공 소녀는 같은 백인에게 사기당해 곤궁한 지경으로 몰린 집안의 딸이어서 피부색의 이점을 상실한 상태이다. 경계 끝에 몰린 프랑스 소녀가 조우한, 베트남에 자리 잡은 화교 집안의 아들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예정이지만,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 프랑스와 베트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주변인이다. 그의 우월성은 부(富)이지만, 뿌리가 취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두 사람은 경계에 있는 사람이고, 여기에서 비롯한 절박함과 위기감, 주변화의 공포를 내재화한 가운데 사랑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서로를 끌어당기고 그리하여 사랑에서 부수적으로 모종의 존엄 같은 것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나 제인 마치가 인정하듯 본질상 창녀, 좋게 보아 정부로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기에 이 확인은 성공하지 못한다. 양가휘 또한 사랑의 감정을 확신하면서도 상대를 정부 이상으로 만들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갇히기에 마찬가지로 확인이 성공하지 못한다.    

  

카타르시스 없는 사랑?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원작 소설을 “카타르시스 없는 소설”로 평가했다. 원작 소설이 기본적으로 누보로망이기에 이러한 평가가 불가피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근거하면 작품의 플롯, 연민과 공포가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연민과 공포는 독자 또는 관객의 몰입을 전제한다. 대상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작품 속 타자의 상황을 통해서 얻는 기쁨이나 정화작용 같은 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는데 원작 소설에서 연민과 공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크리스테바가 말한 대로 카타르시스의 작동이 불가능할 수 있어 보인다. 


누보로망인데다 자서전과 픽션을 넘나드는 구조가 더해져 대상화든 동일시든 서사든 이런 것들이 흐지부지되어 연민과 공포든, 카타르시스든, 전통적 소설의 효과를 무력화한다. 


 자신에서 벗어나진 않으니까 계속 자기 안에서 타들어 가는 구조다. 이 구조는 사랑하기를 사랑했다는 대상화 없는 주체 내의 무한 침잠을 뜻한다. 거기서 주체가 참조할 수 있는 타자는 거울밖에 없다. 그래서 거울을 보게 되지만, 문제는 거울 속에 비친 상이 타자인지 자신인지마저 헷갈리게 된다는 데에 있다. 뒤라스를 고통의 작가라고 하는 이유를 이 고통의 구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소설에서 살짝 방향을 튼다. 카타르시스 없는 텍스트를 부인하고 사랑에 올인하여 원작의 흐름을 수용하면서도 영화 관객이 흡족할 만한 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딘다. 영화는 제인 마치와 양가휘의 사랑에 더 집중하고 그 사랑을 더 부각한다. 메콩강을 건너 리무진을 타고 사이공으로 이동하는 차의 뒷좌석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이 스치는 장면이 나온 것은 불가피했다. 자신 안에 머물기에, 고독을 깨고 슬픔을 넘어서 상대를 정색하고 바라보지 못하지만, 스칠 듯 말 듯 손길의 온기마저 거부하지는 못한다. 


영화는 뒤늦게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감독은 사랑이 끝난 다음에 사랑을 깨닫는 결말을 준비한다. 메콩강만큼이나 허망하고 아름다운 결말이다.


영화가 대중예술인 것을 감안한 적정 수준의 변용이다. 소설에 없지만, 영화에만 있는 여러 장면은 이러한 목적에서 도입됐다. 누보로망을 원작 그대로 영화화한다면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을 잘 살린 작품에 해당하지만, 원작의 특성상 영화화에 본원적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전략처럼 선택하고 집중해서 독자적인 영상문법을 따르는 게 현명하다. 그럼에도 소설과 영화가 긴밀하게 연결된 만큼 영화를 감상하며 소설을 함께 보면 더 좋을 듯하다. 다행히 소설이 길지 않다.     

다리 사이로 관통한 시선   

  

영화의 성애 장면이 당시로는 수위가 높은 편이었다. 개인적으로 성애보다 더 감각적인 장면은 제인 마치가 배를 탔을 때 카메라 앵글을 다리 난간에 걸친 여자 다리 사이로 관통한 것이었다. 자체로 도발적인 느낌을 주는 데다 성적인 분위기를 고조하는 효과를 거둔다. 거의 끝나가는 대목에서 제인 마치가 베트남을 떠나는 배의 선상 난간에 다시 다리를 올린다. 부두에서 양가휘가 배웅하는 것을 알게 된 직후이다. 물론 무의식적 행동이었을 테지만(그렇게 연기했다), 그다음이자 대미인 인도양의 울음 장면보다 이 장면이 더 사랑의 정수를 잡아냈다는 생각이다. 즉자적 몸의 반응보다 더 충실하게 자아의 감정을 잡아내는 것은 없다.


소녀의 다리 사이 공간을 화면에 잡아내는 수미상관이 영화의 숨은 메시지이자,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몸짓언어는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사랑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고백이자 소통이다. 그러므로 “영상의 과잉이 파롤의 결핍으로 이어진다”는 크리스테바의 지적이 난간 장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영화의 끝은 말로 정리된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프랑스에서 작가로 명성을 얻은 화자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는 전화로 말한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며, 죽는 순간까지 사랑할 거라고.

엔딩 크레디트 직전에 자아의 껍질을 뚫고 사랑이 완성된다. 결국 그것은 상호대상화의 달성이다. 


사랑이란, 혹은 사랑의 구조란, 강(江)의 양안에 선 두 주체가, 반복된 호명과 응답을 통한 상호대상화로, 나눠짐이 사라질 정도로 이어짐을 잇는 부단한 과정이다. 상호대상화를 위해선 물론 대상화가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양방향인 상호대상화의 한 방향을 구성하는 이 대상화는, 상대를 대상화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상대의 대상으로 기꺼이 내어놓는 ‘역전된 대상화’를 의미한다. 이 역전된 대상화는 존재의 ‘내기’다. 내가 너를 대상으로 삼는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방식의 일반적 의미의 그 대상화가 아니다. 나를 너에게 바치는, 말하자면 모종의 공희(供犧)를 통해 나는 네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지만, 네가 나의 낮아짐에 응답해 너 또한 너를 나에게 공희(供犧)로 바치게 되면 상호공희(相互供犧)가 달성돼, 양자는 전혀 새로운 경지의 그런 상호대상화에 도달해 서로에게 사랑이 된다. 나아가 서로가 서로에게 신이 된다. 최고의 사랑은 서로를 신으로 만든다.


영화 <연인>의 상호대상화는 지연되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더 애틋한 사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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