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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27. 2024

“죽도록 사랑해” 말하고 정말 죽도록 사랑한 남녀

<쑤저우 강(苏州河, Suzhou River)>

        

강물이 바다로 향하는 건 꼭 바다를 사랑해서만은 아니다. 그러나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한가운데서 마침 그 자리의 중력만은 견딜 수 없다는 듯 그 힘에 순응해 곧장 강으로 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강을 사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누군가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가 등으로 강에 뛰어들었다면 추측은 확신으로 변한다. 영화 <쑤저우 강(苏州河, Suzhou River>(2000년)에서 16세 소녀가 이런 모양으로 강에 뛰어든다. 


중국의 로예(婁燁) 감독이 젊은 날에 창작한 감미롭고 처연한 이 로맨스 영화에서, 투신을 사랑과 등가로 파악해야 하는지가 완전히 석연하지는 않다. 넉넉하게 사랑의 모색이라고 해두자. 뭐라고? 목숨을 걸었는데 겨우 사랑의 모색이라고? 그럴 수 있다. 보통은 목숨을 거는 게 삶에서 가장 실존의 무게가 많이 나가는 행위이지만 드물게 사랑에서 그것보다 무게가 더 무거운 것이 발견될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랑은 목숨보다 상위의 개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건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을 회피한다. 


반대로 사랑이란 확신이 없어도, 아마 그 그림자만으로, 아마 그 모색만으로 목숨을 거는 게 가능한 사람이 있다. 누구에게나 해당하진 않겠지만, 그게 가능한 나이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혹은 어쩌면 그것이 가능한 ‘나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가능한 ‘사람’만 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것이 원래 어느 방향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그림자를 길게 또 짙게 드리우기 마련이어서 그림자에 뛰어들지 않고 사랑에 다가가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할 때 사랑의 모색 없이 능히 사랑을 껴안는 게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림자를 흘겨보는 사람은 발을 들이미는 척하다가 뺄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은 정작 사랑의 본체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반대로 본체로 직진하는, 드문 유형의 사람이라면 그림자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미 밟고 서 있다. 그림자가 맹독성이라면 그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밟은 셈이다. “죽도록 사랑해”라고 말하긴 쉽다. 그저 말해진 그 말은, 말 그대로의 사랑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쑤저우강>은 “죽도록 사랑해”가 말에 그치지 않는, 정말 죽도록 사랑한 특별한 캐릭터를 영상에 담았다.      

목숨 걸고 하는 사랑은 처음이든 몇 번째든 끝사랑’    

  

<슈저우 강>은 사랑에 관한 두 개의 평행 서사를 보여준다. 하나가 주요 서사이고, 나머지가 그 서사를 수식하기에 평행이 아니라는 관점도 가능하다. 사랑을 서사라고 표현한 게 살짝 외람되나 두 서사가 결합해 특이하고 힘 있는 스토리를 전한다. ‘1+1=2’가 아니라 ‘2’를 많이 넘어서는 스토리이다. 막상 찬찬히 들여다보면 서사 하나하나는 특이할 게 없다. 젊은 패기를 앞세운 로예 감독의 독특한 시선과 두 서사의 결합 방식이 그런 느낌을 영화에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게 타당하다.


두 개 사랑의 서사 가운데, 화자인 비디오 기사와 메이메이(저우쉰)의 사랑이 현대적 서사라면, 사랑에 강박적인 오토바이 기사 마다(자홍성)와 사랑에 충동적인 소녀 무단(저우쉰)의 사랑을 전통적인 서사라고 할 수 있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을 뒤섞고 강과 강변을 왔다 갔다 하며 영화는 두 서사를 꽈배기처럼 꼬아버린다.


꼬임은 장차 대배우로 성장할 젊은 저우쉰의 1인 2역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다. <쑤저우강>에서 인어쇼를 하는 여자 메이메이와 (죽은 뒤) 인어가 돼 찾아가겠다며 쑤저우강에 뛰어든 소녀 무단을 모두 저우쉰이 연기했다. 저우쉰의 1인 2역은 두 사랑의 서사를 연결한 다리다. 1인 2역이 일종의 연리지여서, 두 사랑의 서사가 겹치고 현실과 상상이 혼동되며 만남과 이별이 순환한다. 두 서사가 만든 양안의 가운데로 쑤저우강이 흐르고, 적당한 시점에 다리가 놓이고, 누군가가 그 다리 위에서 강으로 뛰어내린다. 앞에서 밝혔듯 강이 아닌 다리 위로 시선을 꽂은 채 물속에다 몸을 던졌다. 


극중 현실의 서사에,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분이 모호한 다른 서사를 접붙인 의도는 캐릭터의 정체성 혼란과 기억의 불확실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어 사랑에 다가가는 이들의 불완전성과 이들 사랑의 불완전성을 동시에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도시화와 현대화 속에서 소외에 직면한 개인이 사랑 앞에서 다시 소외되는 복합 소외를 영화가 그린다. 소외와 소외가 만나면 소외의 극복이 일어날까, 아니면 더 끔찍한 소외가 기다릴까.


마다와 무단의 사랑 이야기는 일종의 도시 전설이다.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여자는 16살 소녀다. 아마 첫사랑. 중요하지 않다. 목숨 걸고 하는 사랑에서 ‘첫’은 의미가 없다. 처음이든 몇 번째든 그 사랑은 ‘끝사랑’이다. 범죄 세계에 발을 걸친 남자는 공모자들의 회유와 압박에 굴복해 사랑에 빠진 소녀를 납치한다. 소녀의 아버지에게서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서이다. 배신당한 소녀는 인어가 돼 찾아가겠다며 쑤저우강 다리 위에서 투신한다. 남자가 소녀를 구하러 강물에 같이 뛰어들지만 구하지 못한다. 감옥을 다녀온 남자는 다시 쑤저우강에 돌아와 그 소녀를 찾아다닌다. 


메이메이는 도시의 대형 술집 커다란 수조에서 인어쇼를 한다. 비디오 기사인 화자가 인어쇼를 촬영하러 갔다가 사귀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화자는 메이메이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다. 메이메이가 자신을 떠날까를 걱정한다. 메이메이를 발견한 마다는 메이메이를 무단이라고 믿는다. 무단과 메이메이를 한 배우가 연기했기에 관객은 1인 2역이 실제로 1인 2역인지, 아니면 1인 1역인지 헷갈리게 된다. 메이메이 또한 무단인 듯, 아닌 듯, 혼란스럽게 행동한다.


마다가 진짜 무단을 찾아내며 영화는 대미로 향한다. 무단과 마다의 이야기가 도시 전설에 관한 환상인지 실제 사건인지 해명하지 않은 채 무단이 진짜 무단인지, 또 만나자마자 마다와 무단이 강에 빠져 죽은 이 사랑 서사의 급박한 결말이 사실인지, 영화는 모호하게 처리한다. 화자인 비디오 기사의 카메라를 통해 영화가 전개되는 상황도 모호성을 배가한다. 화자와 감독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감독은 등장인물이 아니지만, 등장인물의 카메라는 감독의 것이다. 동시에 등장인물의 카메라이다. 이러한 장치는 극중에서 사실의 지위를 확보한 메이메이와 그 사랑 이야기가 마찬가지로 꾸며낸 것임을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해서 상기하는 효과를 거둔다. 그러므로 감독의 이러한 ‘준 메타’적 개입으로 영화적 사실, 혹은 픽션의 진실은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고 관객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 집중할 여건이 조성된다.


마다와 무단의 이야기 비중이 크지만, 영화는 주로 메이메이와 비디오 기사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본령이랄까, 고갱이랄까, 아무튼 그 비슷한 것을 논한다. 당연히 마다와 무단의 도시 전설은 쑤저우강의 사랑학에서 중요한 자료로 제시된다.     


두 개의 실종     


도시의 주변부 인물인 메이메이와 비디오 기사인 화자는 현실을 지배하지 못하고 지배당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대도시의 외곽에서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그들 존재의 불안과 사회적 고립은 사랑을 대할 때에도 이어진다. 부유(浮游)의 층에서 마주쳐서 서로를 휘감아 도는 각각의 불안과 고립은 사랑의 씨앗 비슷한 것으로 일단 묶이긴 한다. 


마다와 무단의 이야기를 전하며 메이메이가 묻는다. “내가 사라지면 마다처럼 죽을 때까지 나를 찾아다닐 거냐”고. 화자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목소리다. 메이메이는 “거짓말”이라고 반응한다. 자신을 무단으로 단정하며 주변을 맴도는 마다에게, 메이메이는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사랑에 목숨을 거는 행태야말로 가혹한 삶을 살아내는 가운데 가능한 최고의 비상임을 메이메이가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그 행태가 지고지순해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가능한 비상이라서 메이메이가 무단에게 끌렸을 것이다. 날아오르면 곧 추락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진짜 무단이 나타난다. 마다가 마침내 진짜 무단을 도시의 편의점에서 찾아낸다. 기다림은 길었고, 재회는 너무 짧았다. 마다와 무단이 재회하자마자 물에 빠져 죽어 쑤저우강에서 시체로 떠오른다. 동반자살 같지만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실종된 무단을 찾아 헤맨 마다의 사랑의 여정이 종착점에 도달한다. 이제 무엇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기에 해피엔딩이라고 해도 좋겠다. 마다가 무단을 찾아서 쑤저우강 주변을 더는 헤매지 않아도 된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이란 도시 전설이 남았지만, 실상은 죽음만이 갈라놓지 못한 사랑이었을 수 있다.


이제 액자영화의 실종이 현실의 실종으로 전화한다. 메이메이가 사라진다. 화자에게 자기를 찾으러 오라는 메모를 남긴 채 남녀의 시체가 발견된 다음 날 종적을 감춘다. 눈앞에 있는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돌아올 사랑에다 사랑의 내기를 건다. 사랑이 문제였을까, 사람이 문제였을까.


당신이 감독이라면 화자로 하여금 메이메이를 찾게 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는 사랑의 문제집에 출제예상문제로 들어있지 않을 것이기에, 관객은 영화 차원의 답변을 고민하면 된다. 답이 거의 나와 있다. 이 영화는 쭉 불모의 사랑을 표현했다. 무단과 마다의 이야기 또한 하나의 액자영화이자 영화 속 환상으로서 (또는 환상이 아닐 수 있다)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실패하는 사랑으로 그렸다. 수면 아래에서만, 즉 인어가 되어서만 이룰 수 있는 사랑을 물 밖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이룰 것인가. 강은 흐르고 인간은 강변에 남을 테니 말이다. 


영화의 결말은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한 젊은 감독의 해석이다. 그리스 신화의 탄탄로스가 받은 형벌처럼 인간은 완전한 사랑을 꿈꾸고 갈구하지만 이루지 못한다고. 결론은, 이루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이루지 못함에도 갈구한다이다.      


사랑의 서정시     


두 개 서사를 교묘하게 엮어서 사랑에 관한 뚜렷한 성찰을 흥미롭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전체로서 사랑의 서정시이다.


강물에 뛰어든 소녀 이야기는 중국을 떠나 세계 각지의 신화나 민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투신이 주요 소재였다면 이 영화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투신 이야기는 지렛대가 된다. 투신한 소녀 이야기를 바탕으로 메이메이가 떠남으로써 두 이야기가 겹쳐지고 순환하며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산출한다. 메이메이는 강물에 뛰어들지 않고 강을 떠난다. 그의 떠남은 고단한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고립과 불안을 상징하고, 사랑을 포함하여 이 시대 인간관계의 파편화를 반영한다. 한강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채식주의자> 중)는 문장처럼 화자는 ‘갑자기’ 메이메이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진다. 알던 강물은 벌써 바다로 흘러가 버렸다. 강은 흔한 사랑처럼 그저 무지의 지였을 뿐이다. 그럼 다시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전통적 서사와 현대적 서사는 쑤저우강에서 만나 영화로 쓴 사랑의 서정시로 재탄생한다.


영화 제목이 쑤저우강(苏州河)이다. 강은 이 영화에서 상징의 핵심적 플랫폼이다. 강은 삶의 흐름, 시간의 흐름이며, 운명이다. 인간은 강안(江岸)에 머물 때만 사랑하고 미워하고 헤어지고 재회할 수 있다. 그러나 “죽도록 사랑해”와 같은 찰나에 구현되는 사랑의 열반은 강안을 떠나서만 가능하다. 죽을 만큼 사랑하고 싶지만 죽은 인간은 사랑하지 못하기에 우리 사랑은 언제나 근사치에 머문다. 


인어가 영화에서 의미소로 작동한다. 쑤저우(苏州)의 쑤(苏)는 간체자로, 정체자로는 소(蘇)이다. 쑤저우(苏州)보다는 소주(蘇州)가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소(蘇)는 ‘소생(蘇生)하다’에서 사용한 소(蘇)자이다. 표의문자인 한자 ‘소(蘇)’ 안에 흥미롭게 물고기[魚]가 들어있다. 영화에서 인어는 사랑의 소생과 연결된다.  


쑤(苏)가 비슷한 뜻의 다른 소(甦)로도 읽히는 것에서 의미가 더 확실해진다. 소(甦)는 글자 구성상 다시[更] 살아난다[生]는 뜻이다. 그러나 그 소생, 혹은 재회는 아주 잠깐이고 곧 소멸해야 하는 물방울 같은 것으로 영화가 그린다.


쑤저우강은 세계 최대 도시 상하이를 통과하는 도시 하천이다. 도시인의 사랑이 그러하듯, 평화로운 전원풍경 같은 건 없다. 현대 중국의 일상과 사회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로예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영상을 구성했다. 주로 핸드헬드 카메라를 사용하여 인물들과 주변 환경의 현장감과 긴장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고, 역동적이고 혼란스러운 도시의 삶을 관객에게 날것으로 보여준다. 그곳이 사랑의 배경이다.


비극적이고 파괴적이며 운명적인 사랑은 아름다운 전설이 돼 쑤저우강을 흐르고, 전설을 상실하고 강안의 낡은 건물들을 떠나지 못하는 현실의 사랑은 낭만이 없고 절망마저 사라진 박제된 욕망으로 기억된다. 그럼에도 강가를 서성이며 강물 바라보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누군가가 어느 강에든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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