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2022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은 한마디로 무엇에 관한 영화일까. 관객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마 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답이 많지 싶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향해 풀어낸 감정의 애틋한 선이 관객마저 칭칭 휘감아 먹먹하게 엔딩을 지켜보게 만드는 영화라고 할 때 그 감정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만 차오를 뿐 넘치지 않는, 다가오지만 어긋나기만 하는 마음들의 역삼투를 사랑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감정의 선이라는 표현도 부족하다. 존재의 선이라고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은 상실을 이야기한다.
“<헤어질 결심>은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수사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른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마냥 비극적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 보다 미묘하고 우아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네 번의 살인을 저지른 연쇄 살인마 탕웨이?
탕웨이가 분한 송서래와 박해일이 분한 장해준이 피의자 대 형사로 만나, 석양의 바닷가 밀물 장면과 함께 대미를 장식하기까지 서래는 네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보기에 따라 다섯 번일 수도 있다. 마지막 살인의 대상은 자신이다. 어머니와 남편, 무고한 할머니까지 살해했으니 기술(記述)만으로는 얼핏 영화에서 다루는 전형적인 악녀의 행각을 연상하기 쉽다.
서래가 해준에게 묻는다. “내가 그렇게 나쁘냐”고. 그런 항변이 나쁘지 않은 게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살인에 사악이 깃든 게 한 번도 없다. 첫 번째 살인은 어머니의 요청으로 그의 안락사를 도운 것이어서, 즉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간호사가 되었다가 법률용어로 어머니 존엄사의 조력자가 된 것이어서 살인의 범주에 낀다기보다는 살인과 활인의 경계에 걸쳐 있다. 두 번째 살인은 명백한 살인이다. 이 살인 사건을 계기로 착하고 다정한 형사 해준과 조우한다.
두 번째 살인은, 일종의 납치결혼과 연이은 폭력적 감금 상태에서 나쁜 남편을 폭력으로 제압한 논리상 정당방위에 근접한 살인이다. ‘마침내’ 죽어야 할 사람을 ‘마침내’ 죽인, 윤리적으로 범죄 성립을 두고 논란이 많을, 단지 실정법상 살인일 뿐이다. 이 사건은, ‘마침내’ 서래의 우는 장면을 보며 그의 무죄를 확인한 해준이 서래를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해준에게 보인 것과 달리 ‘마침내’ 운 장면은 사실 운 장면이 아니었다. 해준으로 하여금 자신이 운 것으로 인식하게 하려는 속임수였다.
그리하여 서래의 범죄가 완전범죄로 일단락되는 순간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지 않았으면 학대받은 아내가 폭력남편을 응징한 완전범죄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모범 형사 해준에게 서래의 범죄를 확인할 계기를 제공한다. 둘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완전범죄가 두 사람 모두에게 나름의 해피엔딩을 주었을 테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과 해피엔딩은 특정한 부류의 영화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으면 ‘마침내’ 죽고, ‘마침내’ 운 것으로 ‘마침내’ 두 사람의 사랑이 사랑다운 사랑이 되었을 수 있지만, 아마 그랬겠지만, 영화처럼 아름답고 처연한 결말을 기대하지 못한다.
“당신이 사랑을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영화 말미 서래의 중국어 대사가 이 영화를 압축해서 설명한다. 현실에서 드문 일로, 사랑의 결정적 확인이 이 영화처럼 사랑의 종언을 확증하기도 한다. 사랑의 종언으로 사랑을 확인하며 사랑이 시작하기도 한다. 해준과 서래에게 순차적으로 각각 일어난 일이다.
해준은 품위의 인물로 설정된다. 품위의 이유는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다. 서래의 범죄를 파악한 형사 해준은, 품위를 잃으면서까지 서래의 범죄를 묵인한다. “핸드폰은 바다 깊숙한 곳에 버려요.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이란 말을 남기고 해준은 떠난다.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가지 않은 그 사랑 고백을 남기고 해준은 형사로서 ‘붕괴’한다. 범죄은닉은 형사의 품위를 성립게 하는 목록에 들어있지 않을뿐더러 품위를 무너뜨리는 목록의 첫 줄에 들어있다. 핸드폰은 범죄의 증거물이자 사랑의 징표이다. 사랑의 징표는 이후 또 다른 살인 범죄를 유발한다.
어긋난 사랑은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긋남 때문에 삶을 접질리게 한다. 삶에 접질리어 주저앉은 상태에서 사랑의 사태(沙汰)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결단을 가능케 한다. 사랑은 삶과 헤어질 결심까지 하게 만든다.
세 번째 살인은 해준을 지키기 위한 살인이다. 자신의 살인이 다른 살인을 유발할 것을 예상하고 일종의 보복 살인의 전개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자신이 사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살인이다.
범죄를 찾아내는 형사를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 마지막 살인 즉 자신의 살해 또한 크게 보아 사랑한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한 살인이다. “내가 그렇게 나쁘냐”는 서래의 항변이 그렇게 뜬금없는 얘기가 아닌 셈이다. 살인범을 살해함으로써 이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해준의 가슴에 영원히 남는다. 서래는 바람대로 해준의 영원한 미제사건으로 바닷가에 파묻힌다.
세 번째 살인과 네 번째 살인 사이에 한 번의 살인을 추가해도 된다. 직접 살인하지 않았지만, 살인의 마무리를 서래가 맡는다.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는 극의 대미에 밝혀진다. 살인이 서래에겐 사랑이었다. 서래까지 5명이 사망하는 방식이 다르다. 질식사, 추락사, 급성약물중독사, 동사(?), 익사.
마침내 ‘연쇄살인마’에 등극한 서래의 삶은, 극중 대사로는 “불쌍한” 삶이지만, 캐릭터로는 불쌍한 캐릭터라고 말하기 힘들다. 네다섯 번의 살인에 걸쳐 그는 단호했고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결연한 인물이다. 살인 앞에서 우유부단하지 않았고, 비록 사랑이 자기 몫이 아니었지만 사랑한 사람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 일을 어기차게 실행했다. 사랑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사랑한 사람이 주어질 수는 있으니 말이다. 사랑한 사람이 제 몫이 아니어도 사랑한 사람을 지킬 수는 있으니 말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살인은, 해준이 사랑의 고백 대신 사랑의 행동을 남기며 떠나고, 서래가 사랑하는 이의 더 큰 붕괴를 막기 위해 더 큰 ‘헤어질 결심’을 한 결과로 제시된다. 나비효과이다. 서래가 조금 덜 불쌍했거나, 조금 덜 단호한 캐릭터였다면 ‘완전범죄’ 뒤 두 번의 추가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리는 인물이 대체로 꽉 채운 형상이기 마련이어서 네 번의 살인은 불가피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인생은 날개 위에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섬세한 나비가 아닌”(도리스 레싱, <앨프리드와 에밀리> 중) 것일까.
서래에게 불쌍한 희생양과 치열한 투사의 모습이 중첩된다. 어머니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의 품위를 회복하기 위해 남편을 죽인다. 세 번째 살인과 네 번째 살인을 사랑한 사람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살인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사랑한 사람의 붕괴를 막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의 품위를 지켜주고자 한 불쌍한 여인의 선택을 품위라는 단어로 퉁치기엔 많이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사랑은 우회하였지만 사랑의 디테일을 억압하지 않은 채 자신의 불쌍한 삶에 기적처럼 드리운 사랑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붙들고자 한 서래.
실체가 붕괴하면 그림자 또한 붕괴한다. 서래가 웅크린 웅덩이 앞의 모래더미가, 영상이 그렸듯, 찬란한 석양과 압도적 밀물로 웅덩이 속으로 너무 간단히 그래서 불쌍하게 쏟아져 내릴 때 우리가 차마 서래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게 그에게 살아갈 결심이 불가능함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서래의 마지막 살인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해준이었다면? 그런 결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 식의 허망한 해피엔딩은 <헤어질 결심>이나 탕웨이란 배우에 애초에 어울리지 않기에 논외가 된다. 그럴 바엔 차라리 서래가 타살당하는 시나리오가 더 낫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고 말하는 혐오스런 마츠코가 야구배트로 머리를 가격당해 아라카와 강 근처의 들판에서 쓸쓸히 숨졌듯, 그런 혐오스러운 결말이었다면 미제사건으로 남은 <헤어질 결심> 엔딩의 대단하고 아름다운 슬픔을 구현하지 못했겠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서래와 마츠코가 마음속에서 겹쳐졌다.
마침내 마침표
“당신이 사랑을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영화의 말미에 서래가 해준에게 한,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이 대사는 극중에서 중국어로 말해지기에 관객만 듣고 해준은 듣지 못한다. 이러한 기이한 대화법 자체가 그들 사랑의 기본 구도이다. “내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에 ‘헤어질 결심’이 시작되고 불쌍한 삶에는 붕괴의 도미노가 시작된다. 발터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크스는 혁명은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브레이크일 것이다.”
만일 불쌍한 삶이 혁명의 범주에 묶일 수 있다고 한다면 서래의 마지막 결심을 비상브레이크를 잡아당긴 것에 비유해도 좋을 텐데, 결국 혁명이라는 게 영화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단어 ‘마침내’가 부사가 아니라 구두법임을 확인하고 만다. ‘마침표’라는.
그의 심장
박 감독 말대로 이것이 어른의 감성을 다루었다면, ‘어른’이 어느 정도 나이를 뜻하는지가 자의적이나 ‘어른 감성’엔 동의하게 된다. 두 주인공의 감정과 행태는 전적으로 감독의 연출 때문에 가수 정훈희의 ‘안개’를 공감하는 모습을 취한다. 정훈희가 1967년에 이 노래로 데뷔했고, 이봉조란 천재적인 대중가요 작곡가의 작품이라는 걸 알 만한 연배보다는 ‘어른’ 범위가 더 넓겠지만, 아무튼 감독이 언급했듯 ‘안개’는 이 영화의 핵심 모티브이다.
안개라는 노래의 느낌이나 가사는 물론, 엔딩에서 송창식과 함께 부르는 ‘안개’까지 이 노래의 “그림자 하나”가 이 영화를 관통한다. 마침내, 그 다음에 제대로 된 문장을 쓰고 마침표를 찍을 줄 알고 ‘마침내’를 기다리지만, ‘마침내’가 대체로 ‘마침표’임을 혹은 드물게 ‘마침표’를 찍고 ‘마침내’의 그림자가 뒤늦게 드리운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른 감성’을 안다고 하겠다.
‘안개’의 ‘어른 감성’은 자연스럽게 상실로 이어진다. 예컨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안개 인간”이란 표현 안의 안개가 <헤어질 결심>의 안개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듯 영화나 소설에서 제시된 안개의 다양한 맥락 가운데 이 영화의 안개가 상실의 아우라임은 뚜렷하다. 두 주인공 가운데 상실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진 인물은 해준이다.
“만만하지 않은” 품위를 갖춘 실력 있고 청결한 형사인 데다 모범적인 남편이라는 캐릭터는 한눈에 분열과 상실의 무대임이 드러난다. 여자(아내만을 뜻하지 않는다)에게 따뜻한 음식을 해서 먹이는 친절하고 다감한 성품에 피의자에게 예의 바르고 흉악범과 맞짱을 떠 밀리지 않는 ‘최연소’ 타이틀의 실력파 형사. 완벽한 이 인물은 그러나 불면증에 시달린다.
한 번의 사건으로 해준은 붕괴하며 가정과 직장이 그의 실존에서 허울이었음을 자각한다. 하지만 자각이 그의 불면과 붕괴를 막지는 못한다. 그의 붕괴는 그의 우유부단과 기적처럼 찾아온 ‘마침내’를 ‘마침내’로 인식하지 못하는 허영심을 촉매로 가속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 위에서 그곳에 그가 잠든 지도 모른 채 헛되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뿐이다.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라는 ‘안개’의 가사를 김소월의 시로 바꿔놓아도 감쪽같다. 사랑의 무덤 위를 서성이며 비로소 사랑을 깨닫는다. 사랑은 오고 사람은 갔다. 서래가 말한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사람은 가도 사랑이 남는다.
그는 삶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살았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삶에 장악당하고 살았다. 잠복근무를 많이 해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잠이 오지 않아 잠복근무를 한다고 스스로 말하듯, 막연하게나마 해준은 삶의 불안을 예감했다.
자신의 ‘심장’이 어차피 그의 것임을 알았지만, 내어줄 때를 놓치고 그의 심장이 멎은 그의 무덤 위에서 절규한다. 인공눈물에서, 나는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를 잠깐 떠올렸다. 상실을 이야기한 비극이란 공통점에서 그랬을까, 따지고 들면 다른 점이 더 많다.
전통적인 사랑의 서사를 감각적인 현대성의 교양으로 승화하다
<헤어질 결심>에 n차 관람이 이어진 이유는 다양한 복선과 감각적 처리 등 연출의 재능이 확연하게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박 감독의 연출역량이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바닷가 도로의 부감샷은 대미를 장식하는 메시지로 손색이 없다. 자기분열과 소통불능 속에서 서로를 향한 끊임없는 탄탈로스적인 욕망이 시종일관 분출하다가 마지막엔 마침내 마침표를 찍어야 하였고, 엔딩 장면은 부감샷의 부연에 불과하였다.
부감샷은 바닷가 도로를 경계로 화면을 나눈다. 아스라하지만 뚜렷한 분할. 그러한 원경의 수평적 갈림은 지상과 지하, 생과 사의 갈림이란 근경의 수직적 갈림으로 대치된다. 멀리서는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가까이선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한다.
녹음기 속의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해준의 말을 “사랑해요”라는 말로 스스로 번역해 끊임없이 듣는 서래. 그 번역이 잘못된 게 아니지만, 때로 길고양이에게 한 중국어의 ‘마음’을 ‘심장’으로 알아듣는 등 현대 문명의 이기를 통한 소통의 풍경과 그 소통의 근원적 한계, 그럼에도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애쓰는 열망이 관객을 마음 아프게 한다.
화면을 편집하며 시공간을 짜깁기하는가 하면 상상을 능청맞게 현실로 자연스럽게 치환함으로써 그들의 분열의 현실과 합일의 욕망을 형상화한다. 특히 “당신이 사랑을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라는 말을 중국어로 말하게 하고 핸드폰 앱으로 번역하지 않은 마지막 대화 처리가 감각적이었다. 마치 뛰어난 광대가 공연과 무대를 완벽하게 휘어잡듯, 감독은 관객을 지배했다.
많은 복선 중 ‘심장’과 ‘마음’의 오역이 개입한 죽은 새의 장사 장면은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란 대사와 호응하며 대미를 완성한다. 영화로 만들어진 성인을 위한 성장소설 같았다. 문학에서 흔히 성장소설로 번역되는 Bildungsroman은 교양소설로도 번역된다.
정훈희의 ‘안개’의 전문을 읽어보는 게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유행가로 최고의 교양물을 만든 박 감독의 재능이 놀라울 따름이다. ‘안개’가 내내 정훈희의 목소리로만 나오다가 송창식과 함께 부르는 것으로 엔딩이 흘러나오면 마지막 장면과 결부되어 관객은 위로를 받을까, 아니면 더 큰 슬픔을 느끼게 될까.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돌아 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 다오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