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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이나 Dec 31. 2023

나는 돌아가는 걸 힘들어한다.

과거로의 여행

사람은 자고로 꾸준해야 한다. 성실해야 한다. 한 가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건 대단한 능력인 것이다. 난 간호과를 두 번 입학했었다. 21살 때는 계획된 입학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실업계라 고 3이 되어 취업하면 학업은 끝나고 졸업식만 참석하면 되었다. 나는 고 3이 되자마자 국비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고 바로 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자금을 모아 간호과를 가는 게 목표였는데 월급을 받으니 집을 탈출하고 싶어 자취를 시작했다. 2003년도 직장에서 받은 월급은 65만 원 세 달에 한번 보너스를 포함해 100만 원을 받았는데 자취를 하니 돈이 모이지 않았다. 그래서 21살 때 아빠를 설득해 학자금 대출을 300을 내고 당찬 희망을 품고 학교를 다녔건만 한 학기 만에 포기했다. 왜인고 하니, 두 가지 사건으로 내 멘탈이 무너졌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건은 강도를 만난 것! 자취하는 원룸 바로 밑에 책방 겸 편의점이 운영되고 있었고 나는 저녁부터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마감을 하고 가면 되었다. 집이 바로 위층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아르바이트하면서 전공 책도 볼 수 있어서 나름 만족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혼자 마감하고 불 끄고 나가려는데 시커먼 그림자가 문을 쓱 열고 순식간에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놈이 칼을 들고 있으니 어쩌나. 두 손 들으라니 손 들고 현금을 통째로 들고 가는 걸 보고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후 난 편의점 알바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잘렸다고 해야 하나? 내가 피해를 입었는데, 주인은 나를 마치 죄인 취급하며 그렇게 하고도 일을 할 생각을 하느냐는 식으로 말을 했었다.


두 번째는 학교 전체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었는데, 그 당시 보건대는 선배, 후배를 묶어 연대 책임도 지게 하고, 서로 돕게도 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체육대회날도 선배들이 후배들을 독려하면서 응원과 각종 종목에 참여를 시켰다. 나는 아침도 못 먹었는데 점심을 오후 3시에 주더라. 그것도 김밥... 아침부터 굶다가 김밥 먹고 밤에 응급실 실려갔었다.


의사가 내린 진단은 위궤양이었다. 22살에 위궤양.. 처음 걸려봤다. 체육대회 날 밥을 못 먹었다고 생긴 건 아닐 것이고, 정말 내성적인 내가 간호과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워 받은 스트레스, 전공서적의 어마한 공부분량으로 인해 신경성 궤양이 생기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이후 나는 학교에 다시는 갈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 조직(?)에 적응을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간호과에 미련이 남았다. 나는 정말 이타적인 성향으로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는 나일팅게 일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단 말이다.


24살까지 혼자 자취하면서 시들해가는 나를 오랜 친구가 부산으로 데리고 갔고, 나는 바로 수능을 봤다. 그리고 간호전문대를 대기 타다가 간신히 들어갔다. 그때도 장학제도로 국비를 받을 수 있는 제도는 없었다. 300만 원의 빚을 지고 매달 이자만 내고 있는데 또 학자금 대출을 했다. 간호과는 등록금이 비싸다. 책도 비싸다. 1년 다녔나? 또다시 자금난에 시달렸다. 부모님, 어느 누구도 날 지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핑계다. 그냥 내가 공부를 못한 거다. 계속해나갈 자신이 없어서 학교에서 또 사라졌다. 솔직히 두 번째 간호과 들어갔을 때 확실히 느꼈다. 간호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아 다시 도전했지만 나는 한번 갔던 경로를 돌아가 다시 출발하는 걸 엄청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실패... 도전... 실패.. 도돌이

그냥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선택해서 한 도전을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최초로 내가 한 선택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앞으로 무엇을 해도 '역시 난 안돼, 그것 봐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이렇게 사단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겠지.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는데 실패감을 안고 그 도전은 끝이 났다. 그 미지근한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꽤 오랫동안 후유증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도전을 좋아한다. 스마트 스토어도 해보고, 블로그, 한국어 수업, 주식, 영어 강사 얕고 넓게 해 보았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건지, 새로운 도전이 좋은 건지 나도 모른다. 그냥 끊임없이 새로운 걸 찾아서 해보려 한다. 나의 이런 모습에 도리어 지켜보는 신랑이 지쳐버리곤 했다. 급기야 유니를 출산하고 육아를 하면서 부업을 하다 보니 번아웃도 여러 번 왔었다. 그때는 잠깐 휴식하고 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많은 생각을 하고 다양하게 시도해 봤는데 끝까지 해본 게 없다는 게 문제다.


예를 들어 스마트 스토어는 물건을 공급해 주는 게 너무 즐거워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플랫폼들이 나의 순수한 공급자의 마음을 아나? 높은 수수료, 어려운 플랫폼 제도, 흉악한 제도가 짜증이 났다. cs는 당연히 짜증 나지.. 흠흠... 하지만 아이를 기르는 엄마에게 충분한 시간은 없다. 하루가 훅 간다. 그리고 적극적인 가족의 지원이 없으면 힘들다.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업을 해본 적이 없으니 시간관리, 감정 컨트롤 모든 것이 미숙했다. 그리고 가족은 초보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랑과 나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감정도 아이와 같았고 수입도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스스를 접고 한국어를 1년 넘게 했다. 블로그에 한국어 자료와 공지를 통해 학생 두 명이 수업을 하기 원했고, 아이와 집안일을 하며 두 명을 꾸준히 가르쳤다.


그러다 직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3교대를 하는 직업의 특성상, 수업을 규칙적으로 하기 힘들었고, 내 체력이 받쳐주지 못했다. 그래서 잠깐 쉬자고 합의를 보고, 직장 일만 했다. 그리고 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복잡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국어 수업을 하려는데 전에는 분명 성의껏 수업 준비해 재미있게 했는데 흐름이 끊어지고 다시 이어나가려니 막막하기만 했다. 수업의 질은 자연스럽게 떨어졌고 예전의 열정이 생겨나지 않았다. 아.. 이때쯤 번아웃이 왔던 것 같다. 다시 회복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가르치는 사람이 열정이 없고 성의가 없으면 학생은 바로 느낀다. 그들은 떠나갔다. 난 그게 오히려 반가웠다. 그냥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끊임없이 생각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하면서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서 수입을 만들 수 있을까, 내가 평생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나는 정말 무엇을 잘할 수 있나. 이것 해볼까 저것 해볼까.' 나는 다시 실패를 만회해 보고자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아 입으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해보았다. 내가 포기한 것은 돌아가기 싫고, 어서 이 실패감을 대체할 내 옷을 찾아 입어야 한다. 이런 내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고 내 뇌의 시스템은 또 실패감에 눌리지 않기 위해 생각의 회로를 바쁘게 돌리기 시작한 일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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