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골라주는 세상 말고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큰 일을 앞두고 하는 선택뿐만 아니라 국자를 하나 고르는 것도 쉽지 않다. 내가 선택한 국자는 앞으로 나의 세상의 일부가 될 테니 말이다. 답답하다 보니 가족, 친구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물어본다. 어떤 사람들은 큰 일을 앞두고는 용하다는 점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나를 만난 적도 없는데 나에 대해 척척 알아맞히는 무당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것 같다.
정말 그들이 추천해 준 대로 할 것인가?
추천한 대로 하든 추천한 것과 반대의 선택을 하든 결국 본인 마음대로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모든 사람이 "내가 선택한 세상에서 살기"를 실천하고 있다.
"나는 어릴 적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경영학과를 갔어요."
경영학과는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선택이었고 그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본인의 선택이기도 하다. 부모님이 추천했고 본인이 선택한 것이다. 실용음악과도 있고 건축학과도 있었지만 경영학과를 갔다는 것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다는 의미다. 본인의 선택이다. 본인의 선택이 본인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는 심리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늘 선택을 한다.
지금 우리가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과 공간, 그리고 어떤 글을 읽을까 하다가 선택한 "내가 선택한 세상에서 살기"라는 글마저도 내가 방금 한 선택이다. 나+이 순간+이 공간이 내가 사는 세상이고 내가 선택한 세상이다. 우리는 1분 전, 10분 전, 1시간 전, 1년 전에 내가 선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선택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도 우리는 세상을 만든 신적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스폰된 일개 몹이다. 어떤 몹은 부유하게, 어떤 몹은 건강하게, 어떤 몹은 똑똑하게 태어나지만 어떤 몹은 그렇지 못하다. 애초에 선택이라는 것은 '선택지'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은 쉽지 않다.
선택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프리스타일 즉흥연주처럼 60 bpm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나름의 연주와 연기를 계속해야 한다. 어떤 동작을 할 것인가, 어떤 음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주제와 소재로 할 것인가에 대해 박자에 맞게 계속 선택해야 한다. '아무거나 골라'라고 하기엔 잘못된 선택으로 괴로웠던 경험과 더 적은 보상으로 인한 아쉬움에 대한 경험은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선택 미루기'로 인해 사라져 버린 선택의 기회는 우리를 서두르게 한다.
다음 스테이지를 향한 선택
처음에 주어진 특성과 지금까지의 선택에 의해 바꾸기 쉽지 않은 영역이 있고 우리의 선택지는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다음 스테이지는 늘 지금의 선택 안에 숨어 있다.
가볍게. 단단하게.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속상해하지 말자,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까지 곱씹는 것은 몇 번 씹어보면 불필요 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 가는 쪽을 향해 가볍게, 그러나 단단하게 한 발 내딛자.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선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