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소심하지만, 잘 살고 있습니다 #24.
그 날은 어머니의 칠순 날이었다. 우리 부부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산소가 있는 고향으로 여행 계획을 잡았다. 그 여행에 여동생과 남동생네 가족들도 합류하기로 한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특히 여동생이 의욕에 넘쳤다. 그리고 동서들과 함께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음식 준비에서 사단이 났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음식을 준비한 건 여동생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산소를 돌보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큰 소리가 났다. 여태 잘 지내왔던 여동생과 와이가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다. 여동생은 와이프와 남동생네가 함께 음식을 준비하지 않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게 분노까지 할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사태가 그랬다. 가끔씩 화가 나면 혼절하곤 하던 여동생 생각이 났다. 이렇게 어머니의 칠순 여행은 전혀 뜻하지 않은 결과로 끝이 나 버렸다. 적어도 나는 그 날은 참았다. 나까지 화를 내면 가족 연이 아예 끊어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가기만 했다.
두 번째 사건은 카톡 때문에 일어났다. 이번에도 여동생이 화근이 되었다. 어머니를 챙기지 않는다고 나와 남동생을 꾸짖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참지 않았다. 그 길로 여동생과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전화번호도 차단해버렸다. 마침 어머니의 얼마 안되는 현금을 자신의 아파트 사겠다고 빌려간 참이었다. 어머니의 칠순 잔치에서 있었던 그 사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지금도 그 일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하나의 소중한 관계가 상처와 반목으로 마무리 되고 있었다.
해가 갈수록 이런 단절들이 하나씩 늘어난다. 어느 날 처제는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은채 우리와 연락을 끊었다. 서운할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연락을 끊을 정도의 일은 없었다. 나와 와이프는 사설 탐정을 고용하면서까지 이사를 간 처제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우리의 연락에도 처제는 답이 없었다. 과연 처제는 어떤 일로 그런 결정을 했던 것일까.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지만 딱히 짐작가는 바가 없다. 아니 짐작 가는 그 일이 그 정도의 일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관계의 소중함을 알수록 이런 저런 이유로 연을 끊는 사람들도 늘어간다. 마치 내 사람됨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얼마 전에는 제 때 연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베프 중 한 명이 욕설에 가까운 문자를 보내왔다. 그게 그렇게 큰 실수이고 잘못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런 관계의 단절이 언제나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다가오지 않는다는 거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는 소나기처럼 퍼붓고 간다는 것이다.
실의에 빠진 내게 또 다른 베프 한 명이 위로의 톡을 보내온다. 내 잘못이 없다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그래서 예민하단 소리를 듣는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다음 날도 확인의 문자가 왔다. 지금도 화가 나냐, 괜찮냐는 안부 문자였다. 다른 친구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톡이 때마침 도착했다. 내가 쓴 책을 보내줄까 하고 농담을 던지자 또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수학 학원 원장은 자신이 쓴 기하학 문제 책을, 부산 이케아에서 일하는 친구는 기술 관련 문제집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나마 내 책이 낫다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웃고 말았다.
언젠가 회복할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지금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떠나 보내야 할 관계가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나를 자책하지는 않기로 했다. 인생에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극히 적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한다. 뻔한 교훈이지만 경험을 배우니 또 다르게 다가온다. 앞으로 이런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예민하고 소심한 나는 그때마다 또 나를 자책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조금 생겼다. 조금 더 빨리, 그 우울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