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 짐을 싸면서 소위 '멘탈붕괴'를 경험했다. 나름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며 최소한의 물건을 소유했다 믿었는데, 나만의 정신승리였을 뿐.. 처분할 물건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500일간의 짐을 어떻게 싸야 할지 막막했다. 오대륙을 여행하기에 사계절 의류가 필요하고, 네 돌 안된 꼬마와 함께 하니 각종 비상약, 휴대용 소변기, 수학 문제집과 작은 장난감도 챙겨야 했다. 나의 디스크 재발을 염려해 허리벨트와 허리베개, 찜질기 등 보통의 세계여행자라면 챙기지 않아도 될 짐이 우리에겐 너무 많았다. 나는 여전히 가져갈 게 많다했고, 남편은 지금도 너무 많다며 줄이라 했다. 사계절 옷 2벌씩과 속옷과 양말 3벌씩, 겨울외투 한 벌과 내복, 비상약과 충전기기, 노트북과 패드, 모자와 선글라스, 기본 위생용품 등 꼭 추려야 할 것만 추렸음에도 짐은 여전히 많았다.
보통 세계여행자에게 캐리어를 추천하지 않는다. 저가 항공 이용 시 위탁 수하물 추가 비용이 적게는 40~80달러다. 얼핏 보면 큰돈이 아닌 듯 하지만 잦은 이동이 쌓이다 보면 제법 묵직해진다. 80여 개국을 이동하면서 2개의 캐리어 때문에 추가로 낸 수하물 비용이 대체 얼마인지.... 아흑.
그럼에도 캐리어 2개를 가져갈 수밖에 없던 이유는 디스크가 있는 내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래 걸을 수 없어서다. 결국 여러 고민 끝에 캐리어 2개와 잔짐을 넣을 적당한 크기의 배낭을 매기로 했다.
2022년 6월 27일 커다란 캐리어 2개와 각자 매고 다닐 배낭 3개
여행 시작 후 두 번째 도시, 세 번째 도시.. 잦은 이동을 경험하면서 느끼게 됐다.
하아... 짐이 너무 많구나.
결국 우리는 조금씩 물건을 정리했고, 여행 190일 차에야 밴쿠버에서 한국으로 큰 캐리어 하나를 보냈다.
필요한 건 현지에서 충분히 살 수 있고 우리처럼 선진국 위주의 여행을 할 경우에는 품질 좋은 물건을 어디서든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
한국에서 스킨, 로션, 에센스, 수분크림, 아이크림을 바르던 나는 500일 내내 아이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세타필' 크림을 발랐다. 물론 자외선 차단을 위해 모자와 선크림을 챙겼지만, 숱한 나라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이 내게 피부가 왜 이렇게 좋냐고 물었다. 늘 이중세안과 5단계 화장품을 바르던 나는 비누로 세안하고, 세타필 크림을 발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 피부의 변화는 없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물건 속에 살았구나 싶다.
서울 아파트에서 살던 정우는 장난감과 각종 교구에 둘러싸여 지냈다. 물려받기도 선물 받기도 하고, 직구까지 동원해 구매했던 두뇌와 정서발달을 위한 각종 물건들은 우리 여행에 감히 따라오지 못했다. 그저 색연필과 연필 몇 자루, 큐브 장난감 하나 챙겨간 게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장난감이 없다며 지루해하지 않았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놀거리였고, 아이의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나게 했다. 좋아하는 비행기를 매주 볼 수 있고, 공항을 탐방하고, 식당과 상점의 집기들, 메뉴판, 웨이터의 나비넥타이와 앞치마까지 모두 아이의 관심거리였다. 숙소에 있던 물건들을 진열해 <정우마트>를 열어 물건을 판매하고, 돈 계산을 했다. 웨이터가 될 때면 메모지에한글과 영어로 주문을 받아 적으며 쓰기 연습을 했다. 어느샌가 외국인과도 스스럼없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500일 간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한 것들이 아이 스스로 깨우치게 했다.
마트 사장님이 되었다가, 레스토랑 웨이터가 되기도 한다. (팀버피자 사장님의 선물 에코백은 앞치마로 변신)
요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찜솥과 사이즈 별 냄비와 프라이팬, 각종 조리도구와 조미료가 갖춰야 한다고 믿었지만, 여정 내내 접이식 과도와 작은 가위 하나로 충분했다. 가끔 멋진 주방이 갖춰진 에어비앤비에 머물 때면 행복하긴 했지만, 현란한 도구 없이도 늘 신선하고 맛있는 요리를 먹었다.
물욕 없는 남편의 경우는 더 했다. 티셔츠 3벌과 바지 두 벌로 500일을 버텼다. 새로운 옷을 사는 건 옷이 찢어져서 못 입게 될 때뿐이었다. 그저 깨끗하게 세탁해서 입으면 그만이었다. 때때로 멋진 쇼핑몰이 가득한 대도심에 가면 쇼핑을 못해 안달 난 내게 "꼭 필요한 지 다시 생각해, 여행 중에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야?" 라며 나의 쇼핑욕구를 잠재웠다. 그럴 때마다 입을 삐쭉거리며 기분이 상했지만, 만약 매번 물건을 샀다면, 500일 여행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을 거다. 예산도 예산이지만, 그 많은 물건들을 이고 지고 여행할 상상 하니 끔찍하다.
실제로 파리 쁘렝땅 백화점에서 크리스찬 디올의 시즌 레이디백에 홀딱 빠져버렸다. 할인과 면세 혜택을 받으면 국내보다 꽤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7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핸드백을 수십 번 매어보며 흐뭇했다. 웬만하면 구매를 말리던 남편과 아이도 눈이 동그래진 채로 엄마! 너무 예뻐!!! 를 외쳤다. 남편도 내게 찰떡같이 어울리던 그 가방을 사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발걸음을 돌려 나왔다. 남은 200여 일 간 그 비싼 가방을 상전처럼 모시고 여행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예뻤다.)
한국에서는 학군지 혹은 상급지로의 이동을 늘 바랬고, 복잡한 도심 속 고층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렇게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며 사는 게 성공한 삶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500일 여정을 거치며 깨닫게 됐다. 자연과 함께 하는 소소한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멋진 쇼핑몰과 고층 빌딩이 즐비한 대도시를 여행하는 것보다 미국 남부 시골 마을을 여행할 때, 산속에 둘러싸여 있는 조지아 카즈베기에서 머문 일주일, 푸른 바다와 맑은 공기의 샴엘셰이크에서 3개월이 훨씬 더 행복했다는 사실을...
매일매일이 충만했고, 순간순간이 벅차올랐다. 우리 셋은 매일 아침 서로 눈을 마주치며 행복하다 말했다. 대도시를 여행할 때면 남편과 종종 다퉜지만, 자연과 가까이 지내며 부부 사이도 좋아졌고, 결정적으로 디스크로 3년을 고생하던 허리가 아주 많이 나아졌다.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우리는 자연과 함께 할 때 더 큰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지겹다고 느끼지 않았다. 매일 봐도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를 찾으며 행복했다. 바쁜 도시의 삶에서 누리지 못했을 땐 몰랐겠지만, 이미 완전한 행복을 알아버린 지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저마다의 가치와 행복의 크기가 모두 다르기에, 누가 맞고 틀리다 논할 수 없다. 그저 우리는 자연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기에, 도시로 돌아갈 수 없을 뿐이다.
이제 한국복귀를 앞두고 어디서 살 것인가?
늘 마음속에 염두에 두던 제주? 강릉이나 속초는 어떨까? 아이 초등학교 입학도 중요한 문제이니, 적응을 위해 살던 동네의 공원 옆으로 갈까? 남편과 정우와 매일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의 삶은 '돈 문제'와도 직결되기에, 한국 복귀 이후 어떻게 돈을 벌어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중대한 문제가 걸려있다.
500일 내내 남편과 여정 이후의 삶에 대해 토론했다. 인생의 후반전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 시점이기에, 제2의 평생 직업을 찾으며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 이제는 지혜로운 투자와 결정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다.
갖고 있던 자금의 리밸런싱과 아이의 균형 잡힌 교육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오랜 시간 숙고했다.
남편 호선생은 39살이라는 다소 젊은 나이에 모 외식기업 임원이 되었다. 임원은 고위직급이지만, 말 그대로 '임시직원'이기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언제든 계약종료와 동시에 짐 싸서 나가야 하는 위태로운(?) 직급이다. 감사하게도 능력을 인정받으며 약 6년 간 커리어를 쌓았지만, 그의 나이 어느덧 48세. 다시 본업으로 복귀할 것인가? 본업에 복귀한다 해도 정년까지 길어야 10년이다. 은퇴 이후엔 무엇을 해야 하지? 은퇴 후 나머지 30년 삶에 대한 준비와 어린 아들이 자립할 때까지의 양육도 염두해야 했다.
무엇보다 자유롭게 500일 간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성장하던 아이가 학원 쳇바퀴 돌며 살기를 바라지 않기에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지식으로 전인교육을 받으며, 삶에 대한 주체적 사고를 지닌 채 성장하기를 바랐다. 미래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IB (International Baccalauréat) 교육을 선택했고, IB 교육의 중심인 제주도 ㅇㅇ 에 와있다.
어느새 제주도 입도 6개월 차다. 그동안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후 너무 재밌어서 학교에서 살고 싶다는 개구쟁이로 자랐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매일 아침 눈부신 햇살과 에머럴드빛 바다가 펼쳐지는 통창 너머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꼭 필요한 물건들로 채워진 내 집에서 1분 거리 학교에 정우를 데려다주고, 해변 산책로로 일부러 돌아 걸어오는 길이면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며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이 피어난다.
거실 통창뷰
뒤로는 한라산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동네
바닷가 옆 해안도로를 달리는 기분 어때?
제주도민이 되던 날, 여전히 다정한 우리 부부
다음 편에는 제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자금의 리밸런싱과 투자를 지혜롭게 했는지, 과연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면 다음 글도 기대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