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2005년에 군대 제대를 했다. 경북 영천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제대하던 날 대문을 열어보니 고생했던 자기에게 선물했다며 한아름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엄마는 아마도 여자 친구가 선물했던 걸 그냥 자기가 선물했던 거라고 둘러댄 것 같다고 하셨다. 동생은 옷도 아무 데나 벗어놓고, 잘 치우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데 제대하고 한 두 달 정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침구를 각 잡아서 개켜놓고, 옷도 빨래통에 잘 벗어놓아서 온 가족이 놀랐었다. 그 이후에는 우리가 알던 동생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돌아왔다.
동생은 제대하고 영원히 기억에서 잊어버린 물건이지만 나는 동생의 제대 후 그것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수양록'이다.
훈련소에서의 일이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훈련소에 들어가면 바로 주는 것 같다. 절반 정도는 빼곡히 적혀있고, 나머지 절반은 백지이다. 그 빽빽한 내용 중 나는 한두 번 '누나'라는 단어로 잠시 등장하고, 대부분은 여자 친구 보고 싶다는 이야기, 부모님이랑 통화하고 나서 눈물 났다는 이야기,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공부 열심히 하고 싶다, 돈 많이 벌고 싶다, 효도하고 싶다.....로 가득하다.
동생의 수양록을 발견하고 단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글로 읽으니 재미도 있고, 힘들게 지내면서 버텼을 것을 생각하니 짠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그때까지 변하지 않던 동생의 삐뚤빼뚤 글씨체가 너무나 귀여워서 내 책장 제일 윗 칸에 소중하게 보관해놓고 때때마다 꺼내어 읽었다. 사이에 끼워져 빳빳하게 말려진 낙엽들, 군대에서 찍은 사진들, 내가 보낸 편지 두 통이 있다.
그리고 A4용지에 타이핑해서 출력한 한 장 짜리 너덜너덜하고 아래쪽 모서리가 잘려나간 종이도 있다. 그것은 동생이 군대 제대하기 마지막 주말에 쓴 일기이다. 동생은 행정병이었는데 아마도 근무하다가 컴퓨터로 작성해서 프린트한 것 같다. 그 글은 처음 읽을 때부터 소중했고 지금은 내 평생의 보물이 되었다.
2년 하루 동안의 군 생활 마감을 앞두고 그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격려해주는 모습이 기특했고, 20대 초반의 청년이 가지는 인생의 포부와 열정과 패기가 느껴져서 동생이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마냥 기특하고 애틋하게만 느껴지던 동생의 글이라서 동생은 잊어버린 그 글을 나는 해마다 찾아서 보았다.
동생 장례식을 마치고 원주에서 부산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집을 청소하면서 책장 제일 위칸, 늘 그 자리에 있던 수양록이 눈에 띄었다. 수양록을 꺼내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사진도 한 장 한 장 다시 보고, 글씨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을 읽으며 동생의 흔적을 느껴보려고 했다. 해마다 꺼내 읽으면서 수양록을 썼던 동생이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느껴졌었는데 동생의 장례식을 치르던 며칠 동안 알게 된 동생의 어두웠던 모습들, 고통과 절망을 알고 나서 읽으니 수양록을 썼던 사람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수양록과 제대 마지막 주말에 쓴 글을 읽고 있으면, 제대 후 동생이 내게 군대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 이야기해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너무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는 주제로 너무 힘들었던 구체적인 사례와 배웠던 많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그걸 듣는 것이 좋았다.
그 나날들이 너무나 그립다. 동생이 남긴 글 원본은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져서 마스킹 테이프로 찢어지지 않게 고정해서 파일에 보관해두고 복사본 한 부는 매일 가지고 다니는 내 수첩에 끼워서 가지고 다닌다. 그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아기 같던 아이가 어엿한 청년이 되어 스스로 돌아보고 다짐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났었는데, 그 예뻤던 아이가 세상에 없다.
2년 전쯤 동생에게 물었다.
"니 수양록에 진짜 귀여운 글이 있는데 한 번 볼래?"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걸 아직 가지고 있냐? 아 꺼져."
동생이 썼던 글을 나 혼자 간직하려다가 세상에 간직하기로 했다. 이렇게 귀여운 글을 썼던 아이가 세상에 있었다.
9월 25일 (일)
오늘은 일요일...나의 군 생활 마지막 일요일 / 휴일이다.
아침 07시에 기상하여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점호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수많은 날들이 있었고,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아주 특별한 일요일이다.
마지막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왠지 모를 섭섭함과 불안함, 허전함이 들게 마련인데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다.
'내가 헛되이 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었을 것이다'
오늘 하루를 멋지게 마감하며 나의 기나긴 24개월이란 시간을 뒤돌아본다.
730일...100주...24개월...2년...
입대하기 전에 듣던 막연한 생활과 다르게 실제로 부딪힌 곳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짜증나는 생활...반복이었다.
처음으로 전투복을 입고, 전투화를 신고, 전투모를 쓰면서 집과 가족과 떨어져 생활을 했다.
하루하루가 꿈처럼 낯설고 어색하며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람이 살면서 가장 어렵다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내가 지금껏 버티며 모든 것을 이기고 참아낸 것은 나를 항상 믿어주고 아껴주고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해내는 일을 나도 할 수 있었고, 해야만 했다.
포기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큰 결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철없는 시절에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남들과 똑같이 0에서 시작한 나의 군대생활은...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표로 삼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누리지 못한 영광을 누리며 이제 5일을 남겨두었다.
5일은 정말 긴 시간...(프린트가 흐려서 글자를 알아보지 못함)
다시 돌아오지 않을(프린트가 흐려서 글자를 알아보지 못함)...2년 간의 여정은 이제 5일을 남겨두었다.
단순하고 무식하지만 (글자 알아보기 어려움) 버텨내기 힘들었던 시간이지만,
잃은 것이 큰 만큼 얻은 것 또한 내 스스로 무척이나 만족할 만큼 크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배웠고, 내가 나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느꼈으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순간순간 묵묵히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모두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법도 배웠다.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던 돈 주고도 못 배울 젊음의 대가다.
이제 100여 시간을 남겨두고, 스스로 떳떳할 만큼의 자신감과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긴(프린트가 프려서 글자 알아보지 못함)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난 할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해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