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파도

by 라라
desert-1911.jpg!Large.jpg Пустыня Date: 1911 / Martiros Sarian


미국에서 미술학원을 접고 한국으로 왔을 때 카톡으로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해주신 말씀들이 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어서 고마웠다.라는 말을 하시곤, 한국말이 서투셔서 그다음 문장은 길게 영어로 카톡을 보내오셨다. 또 어떤 어머님은 자신은 교회를 다니진 않지만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하시겠다고 했다.

미술학원과 같은 층에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님이 계신 한국어린이전도협회 사무실이 있었고, 그곳의 일을 가끔 도왔었었는데, 전도사님께서 복도를 지날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고 카톡을 주셨다. 아이가 스스로 그린 그림으로 대회에서 상을 탔다고 소식을 전해주시는 어머님도 계셨다. 한국으로 온 몇 년간 홈페이지와 카톡을 통해 학원문의가 계속해서 왔고, 한인 커뮤니티에 나를 찾는 글들이 올라온 걸 보면서 내가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구나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 내가 더 잘 되어서 나와 만났던 학생들을 가르쳤던 사람으로써 부끄러운 삶을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나에게 채찍질을 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힘내서 일할 수 있는 힘들임을 고백해 본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이 서툴렀다. 실수도 많았다.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분명한 사명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그다지 좋은 선생이라 할 수도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진심으로 일을 했었다는 것이다. 나는 먹고살기위해 미술학원을 하지만 남들이 뭐라 하든 스스로를 교육자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장소는 상관없다. 정년이 보장되고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한때 학교 선생님을 꿈꿨을 때도 있었다. 정식 선생님이 되는 게 어려워 못 되었지만, 이제는 내 인생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곳에서 교육자라는 사명을 갖고 교육이 필요한 곳에 서고 싶다. 가능하면 가치있는 일을 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여러 아이들이 기억에 남고 특별하지만, 한 아이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한국분, 어머니는 미국분 이셨는데 두 분이 이혼을 하셨다. 조부모님과 고모의 집에서 친척들과 살던 아이였는데, 수업시간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바닥에 드러누워서 원하는 게 이루어질 때까지 울었다. 손이 많이 가던 아이였는데, 할머님이 하루는 나에게 눈물을 보이시며 아이가 상처가 많다고 잘 좀 부탁한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가식적으로 일 할 수 없었다. 최대한 아이한테 잘해 주려 했고, 아이가 그린 그림을 벽에다 붙여 주면, 자기 그림을 한참 쳐다보면서 밝은 웃음으로 행복해했던 아이의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아이가 자신의 그림을 보며 행복해했던 것처럼 그 아이의 앞날도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 차를 갖고 출근하지 않아, 마지막 타임에 온 아이들과 같이 걸어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나는 매일 아이들의 작업 사진이나 활동 사진을 부모님께 보내드린다. 집에 가는 길에 사진 한 장 찍어주겠다고 하니, 유난히 똑똑한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선생님, 우리가 이렇게 지냈던 시간을 나중에 사진으로 보면서 웃을 때가 오겠지요? "

나 : "당연하지, 그렇기 때문에 매일의 순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야 해"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흑역사도 있잖아요."

나 : "당연히 흑역사도 있지"

그 다음엔 아이와 내가 찌찌뽕 하듯이 같이 말했다.

"흑역사가 없으면 인생이 아니지"

나는 몇 살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순간 생각했다.

이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지만, 인생에 대해 생각을 해 본 아이임에 분명하다.


나를 거쳐갔던 아이들은 인생의 파도를 타게 될 것이다. 인생에서 힘든 일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이고

고난이 없는 건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인생의 파도를 서핑하듯 잘 넘으며 그곳에서 많이 배우고 익히면서 지혜로운 사람들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멋지고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8389dc15a29dcc7f0d1829dbdeecd657.jpg 에드워드호퍼 / Ground S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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