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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Oct 01. 2024

우르릉 쾅쾅

비가 올 듯 말 듯 선선한 날씨 속에서 18홀을 다 마치고 샤워하는 동안, 밖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나 보다. 샤워를 끝내고 라커룸으로 나가니, 물에 흠뻑 젖은 사람들이 허겁지겁 들어오며 소란스럽다.


"18번 홀에서 드라이버를 쳤는데 갑자기 우르릉 쾅쾅, 공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도망쳤어!" 

"그린에서 퍼팅하다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서 그대로 철수했지."


각 홀의 사람들 모두 천둥 번개를 피해 급히 도망쳐 들어온 무용담을 쏟아내느라 정신없다. 쏟아지는 비도 비였지만, 우르릉 쾅쾅 천둥 번개가 심해 경기를 끝내라는 방송까지 나왔다 하니 상황이 심상치 않았나 보다. 우리가 무사히 18홀을 마친 건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오늘은 클럽하우스 말고 분위기 좋은 곳으로 가자."

"그래, 좋아! 오늘은 제대로 기분 좀 내보자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멀리 가기는 어렵다. 지수의 남편이 나서서 가까운 오리집을 제안한다. 


'분위기 좋은 곳 가자는데 오리라니... '


집밥 귀신 남편은 어쩔 수 없다고 지수는 체념한다. 비가 쏟아지면서 공을 치러 왔던 사람들로 골프장 근처 꽤 유명한 이 오리 식당은 북적대지만, 우리는 남편 덕에 미리 예약해 둔 조용한 방으로 안내받는다. 창밖에는 쏴아 쏴아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방 안에는 따끈한 온돌과 함께 푸짐하게 차려진 생오리 구이가 준비되어 있다. 생오리를 돌판에 올려 팽이버섯, 새송이버섯, 부추를 함께 구워 먹는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오리를 부추에 싸서 양념장에 찍어 한 입 먹으니, 입안 가득 고소한 맛이 퍼진다.


“와, 너무 맛있어요!”


여자들 입에서 탄성이 나오고, 남자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옛이야기를 나눈다. 비는 여전히 쏴아 쏴아! 무지막지 쏟아진다. 그들이 차지한 2층 방은 얼마나 작은지 남편과 지수, 남편 친구와 서연만으로 꽉 찬다. 그 작은 방에도 제법 큰 창이 있어서 짙은 초록의 나무들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휘청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광경은 그들을 더욱 감상적으로 만든다.


"내가 할 말이 많아."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남편 친구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는 듯 중얼거린다. 서연이 미소 지으며 그를 본다. 지수 역시 살짝 웃으며 그를 본다. 


"자, 맘껏 이야기해. 쏴아 쏴아! 거침없이 쏟아지는 비가 분위기 잡아주네."


지수 남편은 소주잔을 들며 재촉하고 지수도 쨍그랑 그 잔을 부딪치며 동조한다. 그 순간 남편 친구가 갑자기 팍! 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한다. 


“나 지금이 참 좋다.”


그의 목소리에 다정함이 가득하다. 매달 부부 함께 공을 치는 것도 대단한데, 이렇게 매 순간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라니. 정말 부러울 정도로 로맨틱한 부부다. 서연도 잡힌 어깨를 빼내기는커녕 오히려 더 가까이 기대는 듯하다.


“다른 거 없고, 그냥 네 덕에 내가 이렇게 행복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고맙다, 친구야.”


그의 말에 방 안 분위기가 따뜻해진다. 그는 더 많은 말을 하려다 멈춘다. 하려다 멈추고 하려다 멈추며 그저 지금이 좋다만 반복한다. 무언가 깊은 이야기가 나오려다 결국 그 이상은 없는 게 되어버렸다. 그가 말을 멈추고 서연을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난 그냥... 지금이 너무 좋아."


(사진: 꽃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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