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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시선을 혐오한다.

타인과 나를 판단하는 나의 시선에 대하여

by 서박하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하러 가는 길에도 나는 옷을 잘 갖춰입는다. 잘 다린 리넨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가죽 샌들에 가죽 가방을 멘다. 얼굴에 톤업크림을 바르고 마스크로 가리지만 립밤을 바른다. 지난밤에 감은 머리가 잘 못 말라 삐죽거리면 다시 감는다. 15분 정도 걸리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길을 나는 정성껏 준비한다. 그렇다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이렇게도 많이 신경 쓴다. 마주치는 선생님, 매일 지나다니는 상가의 사람들, 같은 반 친구의 엄마들. 나는 그들에게 '단정하고 세련된 엄마'로 보이고 싶다. 그래서 핀터레스트를 뒤져가며 내가 좋아하고 어울리는 최신 유행의 옷들을 알아내고 몇 가지 아이템을 구입하고 몇 벌의 착장을 맞춰놓는다. (착장을 맞춰놓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건 다음에)


여기까지는 뭐 각자의 생활방식이라 볼 수 있겠다. 사춘기 때, 슈퍼에 갈 때도 혹시 누군가 마주칠까 봐 세수부터 다시 하던 나는 이런 30대가 되었다. (어른이라고 쓰려다가 말았다... 진짜 어른은 이렇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때처럼 타인이 나를 바라본다고 여기는 시선으로 타인을 판단한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점심시간에 복도를 배회하며 지나가는 친구들의 얼평(얼굴평가), 몸평(몸매평가)를 했었다. (최악이지 않나?) 게다가 신발 브랜드도 뜯어보며 저건 진퉁일까 짝퉁일까 (진짜일까 가짜일까) 이야기 나누곤 했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나의 철없음에 소름이 돋는다. 그래도 그 철없음을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이런 행각은 대학생 때로도 이어져서 친구와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평가하곤 했었다. 최악 중 다행은 이때는 그냥 옷만 봤다 (...). 아 저 옷에 이런 신발을 신었으면 100점일 텐데. 아 저 티셔츠와 바지는 맞지 않아. 등등. 소름 돋는 생각과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 시절에 대해 다행히도 친구와 나는 돌이켜 반성했다.


그렇다. 내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타인을 그렇게 내가 바라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와 다른 것은 그때는 아무런 죄책 감 없이 타인의 옷과 몸을 훑어 내렸다면 지금은 죄책감을 느끼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시선을 혐오한다.


priscilla-du-preez-UOFSmP-GImM-unsplash.jpg Photo by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



오늘도 유빈(가명) 엄마는 편한 고무줄 반바지에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아이 둘을 데리고 어린이집에 왔다. 아, 팔뚝도 나보다 굵네. 허리도 나보다 두꺼운 것 같아. 나는 배에 힘을 한껏 더 주고 허리를 강조하는 와이드 팬츠를 입은 허리를 흘끗 바라본다. 완벽하다. 미쳤어. 나는 왜 이럴까. 유빈 엄마가 뭘입었든 내가 무슨 상관이람. 차라리 저렇게 편하게 오고 가는 유빈 엄마가 더 자존감도 높고 그럴 텐데. 아이를 데려다주고 일터로 향하는 길에 확실히 비만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나간다. 여름이라 더 눈에 띈다. 나는 나의 팔다리와 배를 잠시 둘러보고 황급히 시선을 거둔다. 내가 무슨 권리로 저렇게 지나가는 사람의 몸매를 평가하나.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판단과 반성을 계속하다 일터(도서관)에 도착한다. 이런 나는 도서관 화장실에서 나보다 몸매가 좋고 더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더 위축된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아름다운 여성이 들어오면 황급히 자리를 뜬다. 나는 자존감이 높고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보는 시선으로 남을 본다.


건강한 정도의 몸과 타인에게 혐오를 주지 않는 옷차림은 중요하다. 본인의 건강과 사회유지를 위해. 하지만 그 이상의 시선과 판단은 잘못되었다. 나는 타인의 외모를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대, 자신의 외모나 타인의 외모를 비하하는 것이 개그가 되었던 시대에서 자랐다. 바비인형을 손에 들고 놀았고, "여자가~""남자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어릴 적, 4.1kg으로 태어난 나를 보며 아빠와 할머니는 '언제 얼굴이 갸름해 지려냐'걱정했다. 지금 어릴 적 내 어릴 적 사진을 보면 그렇게 귀엽고 예쁠 수 없다. 아빠는 7살인 나에게 얼굴이 갸름해지려면 옆으로 누워서 자야 한다고 했다. 9살때즘 키가 크며 살이 많이 빠지고 나서야 '예뻐졌네'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한다. 완벽한 모습을 가져야만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더 학벌과 능력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빛내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자란 나는 이렇게 비뚤어진 시선을 가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교정하는 일은 이렇게나 어렵고 힘들다. 이러한 나의 시선을 인식하고 나서 타인을 인식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요령도 생겼다.


어린이집 근처에서 만나는 엄마들은 눈만 본다. 눈을 마주치고 인사하고 판단이 들어오면 즉시 '그만'이라고 마음으로 외친다.
길을 가면서 사람들을 보지 않는다. 나무나 건물을 보며 씩씩하게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화장실에서는 옷에 뭐가 묻었는지 옷이 튀어나오지 않았는지만 본다.


뭐 이렇게 힘들고 예민하게 사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나도 이런 나의 시선이 싫다. 이런 내가 싫다. 하지만 이런 나를 인정하고 고치기로 한 것에 대해 칭찬해주기로 했다.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나를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자책은 길어질수록 우울과 불안을 가져올 뿐이다. 타인이 뭐라고 생각하든 자유롭게 걸어가길 소망한다. 또 나도 타인을 판단하고 참견하지 않으며 그들만의 길을 응원하려 한다. 나를 존종하는 사람이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다. 성경에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야기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나도 타인에게 나의 옷차림과 얼굴로 판단 받고 싶지 않다. 내가 살이 찌든 말든 옷을 편하게 입든 말든 아무런 판단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물론 사회생활에서 지켜야할 규범들은 있다) 그리고 나도 나를 그런 잣대로 평가하고 싶지 않다. 내가 나를 좀 더 너그럽게 본다면, 어릴 적 할머니와 아빠으로 들었던 말들에서 내가 자유로워진다면 판단의 시선을 멈추지 않을까. 나의 자존감이 정말로 높아지고 건강한 내가 된다면 모든 시선을 느끼지 않을까. 나는 궁극적으로 타인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그동안 나에게 가장 가혹한건 타인이 아닌 나였다.


나는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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