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의 삶 그리고 '몸'

되고자 한다면 이미 그렇게 살아야 한다.

by 김시산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됐고 한차례 크게 퍼붓더니 잠시 잠잠한 상황이었다. 축축한 날씨 덕에 괜히 눈두덩이까지 뭉근해지는 기분이었고 창밖의 하늘만 괜히 노려보고 있었다. 나른한 기운이 씻겨가게끔 한바탕 쏟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약간의 소란이 들려왔다. 비는 아니었고, 작은 소란. 노력해서 볼륨을 낮춘 소리였지만 이 곳이 열람실이라는 걸 감안하면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는 크기였다. 중학생 남자 무리였다. 한창 즐거울 게 많을 나이라 스스로 조심한다고 흘러나오지 않을 부피와 가짓수가 아니라서, 오히려 조심하려는 모습이 기특했다.


세 명 모두 햇빛에 잘 그을린 피부와 편의점에서부터 묻었을 아이스크림 자국을 옷에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리고 똑같이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머리카락과 옷을 포함한 용모가 자율에 맡겨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약간 의아했다. 자율인데 머리카락을 바짝 자른다고?


똑같은 색과 디자인의 교복으로 미장해 개성 없는 기둥으로 바뀔 때, 머리카락은 나의 멋을 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배출구다. 굴뚝구 역할이랄까. 대부분 그 개성은 하지 말라고 하면 괜히 더 하고 싶은 청춘의 반작용과 결합해 ‘가능한 긴 머리’로 구현된다. 앞머리는 속눈썹을 건들 정도, 구렛나루는 턱선까지, 그리고 뒷머리는 그냥 가급적 길게. 머리카락이 길수록 미용사 선생님께 요구하는 항목들도 많아 진다.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가지치기, 지지대 관리 처럼 손이 더 많이 가는 것처럼. 예쁘고 탐스러운 과실을 기르기가 쉬운가. 이렇게 소중하게 관리했으니 이제는 잘 지키는 일이 남아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눈을 피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애석하다. 가장 오랜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야 하는 학교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자발적으로 하면서 자발적으로 도피자가 되다니. 개성과 어느 정도의 과잉을 추구했던 낭만주의 운동이 현실과의 괴리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너무 낭만화일까.


어쩌면 우리 보다는 나, 언제나 보다는 나의 시절, 나의 시대, 나의 청춘 얘기일 수도..


직장인이라고 다를까. 오히려 더 엄격하다. 노무를 제공하는 프로이면서, 급여를 받는 사람이므로, 형식만 갖춘 회사를 대신한 실체를 가진 회사원이므로 용모 단정은 요구 받기 이전에 갖춰야 할 자질이었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머리카락이 길면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이 있고(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 시선을 추종하지 않으면 보는 사람마다 정확히는 선배 내지 상사로부터 머리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다. 볼 때마다. 개인 차원이면 잔소리이지만 집단이 요구하면 그것은 문화라고 보아야 한다. 좋거나 나쁜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일단 문화라는 정의가 먼저 있다.


나 역시 직장인일 때는 단정하고 반듯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적당한 길이의 머리카락을 유지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유연한 기업문화를 추구하는 경향 속에서도 임원과 팀장들은 정장에 가까운 차림새를 유지하는 역사가 오래된 대기업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핀테크 기업이면서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flat”한 문화를 가졌다고 확신하는 토스에서 일하면서는 심리적 제약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것도 토스에서 일하면서이고 지금까지 기르고 다듬고 이어오고 있다.


토스에서 강조하는 “자율과 책임”은 업무에서부터 생활까지 다방면에서 적용된다. 머리 길이도 자유인 것. 일반 회사에도 소위 장발을 한 직원들이 있지만 개성 강한 일부의 전유물 성격이 강한 것 같다. 내가 토스에서 일할 때는 사무실보다는 라운지에서 일하는 게 편한 성향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퇴사한 지금도 계속 긴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앞 머리, 였으나 많이 길어서 옆으로 넘긴 머리카락이 코보다 더 아래까지 오고, 뒷머리는 승모근에 닿는 정도. 감는데 품이 많이 들고 설거지나 책을 볼 때처럼 고개를 숙이면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서 자주 넘겨줘야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이걸 불편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불편하다고 인정하면 불편하지 않은 점을 내놓아야 할 거 같은데, 대부분 불편해서 내놓을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위와 습도가 찾아 오면서 옷이 짧아짐과 동시에 나의 머리 길이도 짧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 고심을 하긴 했으나, 이내 주워 담았다. 아까워서라기 보다는 정체성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이었다.


<몸>의 저자 김관욱 님은 ‘문화란 곧 누군가의 몸의 자세를 형성케 하는 그 모든 것들’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몸은 사상이나 인격이 아니라 신체 그 자체를 말한다. 통상적으로 어딘가에 적응한다고 하면 생활 패턴이나 말하는 방식 등을 습득한다고 이해가 되는데, 신체의 특성이나 작동 방식 역시 뚜렷하게 적용 받는 지점들이라는 것이다.


나의 “긴 머리 유지” 또한 이 정의에 따라서 결정했다. 편견일 수 있으나 시인이자 수필가인 나에게 어울리는 몸은 직장인보다는 긴 머리에 자유로운 차림새를 한 ‘몸’이 더 적합하고 판단했다. 또 스스로의 판단을 넘어 외부의 누군가, 어떤 문화의 공동체에 속한 타인이 볼 때 ‘나’는 직장인은 아니고 글을 쓰겠지, 예술 활동을 할 것 같다 는 짐작을 가능케 하는 그런 몸. 나의 추구와 타인의 짐작이 결합할 때 내 몸이 ‘작가라는, 작가일려는’ 경향성이 강해지고, 그런 몸 내지 테두리에 어울리는 정신이 점점 차오른다고 믿는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처럼.


외롭고 싶은 사람들이 작가가 된다는 얘기도 있지만, 결국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이것이 대화로 이어지려면 반대편에 독자가 있어야 한다. 작가와 독자가 각각 자신의 중심을 단단히 잡고 콤파스로 동그라미를 그리다 보면 그리고 한바퀴 돌 때마다 조금씩 넓게 그리면 언제가 두 원이 만나는 새로운 원(비슷한 도형)이 만들어질텐데, 작가는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전력투구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답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작가다운 몸”을 가져야 한다.


이전 09화퇴사 후 너무 잘~ 누리고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