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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꾹이누나 Jun 09. 2018

지랄미가 나쁜가요?

팩트와 편견 사이


개똥만 치우면 될 줄 알았지


참으로 긴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단 한 번도 반려견과 함께한 적 없었던 우리가족은 갓 태어난 첫 아이를 안고 집에 돌아온 신혼부부와도 같았다. 우리는 흔히 떠올리는 반려견 키우기 제 1 중대과제, 즉 똥오줌 및 개털 치우기와 개냄새 극복하기, 정도만 예상하고 있었고 그것이 곧 얼마나 무책임하고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를 뼈져리게 깨닫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우리 가족은 정말로 반려인이 될 준비가 1도 되지 않았던 거다.

휴지는 치우기라도 쉽지...


준비 안된 건 얘도 마찬가지

전지적 비글시점, 꾹이 역시 마찬가지였을터. 강아지로 태어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인간의 집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제 눈 앞에는 또 처음 본 잡동사니들이 한가득이라니. 체력도 체력이지만 호기심 많은 작은 꾹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시작했다.


인형 조하
발매트 조하
옷 조하

이렇게 몇 십 년을 살아야해?

아침마다 발견되는 그의 저지레에 혼도 내보고, 복종훈련도 해보고, 대화(!)도 시도해보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또 다른 물건이 파괴되어 있었다. 하루는 가죽소파를 다 파헤쳐 스티로폼이 거실을 뒤덮은 적도 있었다. 하필 그 스티로폼이 파란 색이어서 그날의 시각적 충격이 아직도 생생할 정도다!


이제와 고백하건데 매일 그가 남긴 잔해들을 숨기고 치우면서 '지랄'은 욕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육두문자를 쏟아내고, 강아지 강씨라는 그분의 이름을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른 선택지란 없는 것을!

그저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이정도는 애교다 애교

슬로우슬로우 퀵퀵


몇 달이 지나고 꾹이가 씹기 좋아하는 물건들을 조금씩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섬유재질; 이불과 미처 치우지 못한 옷가지 그리고 수건, 발매트 등을 탐했고 우리는 그것들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헌 이불만 골라서 꾹이가 마음껏 뜯고 즐길 수 있도록 '헌납'했고, 엄마는 구멍난 옷의 주인(주로 나)에게 '제대로 치우지 않은 죄'를 물었으며, 발매트는 다섯 개 째 즈음에 규조토로 바꾸었다.


또 에너지가 넘친다는 이 견종을 위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고, 아침저녁으로 콧바람을 쐬주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고 해서 아침에는 5분이라도 집 앞에 나가려고 노력했다.


놀랍게도 꾹이 역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물건을 물어뜯었을 때 눈치를 보고 식탁 밑으로 숨는 등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년 여의 시행착오는 결국 인간과 개 사이의 갭이었다. 개와 인간의 시간은 너무도 달랐으며, 하물며 개린이(개+어린이)가 인간의 룰을 받아들이기에는 더욱 더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그러니깐 이거부터 풀어주고 말해 (feat. 구멍난 담요)

해피엔딩은 아니에요

우리는 꾹이가 탐낼만한 물건을 높은 곳에 두는 것으로 그의 행동에 적응해가고, 꾹이 역시 개껌이나 헌 이불, 인형 등과 같이 저에게 주어진 물건만 손대는 것으로 서로에게 맞춰가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개와 인간 사이의 양보와 타협이 이루어 진 것이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서로 포기할 건 포기한 거다.


너무 아름답게 포장해서 꾹이가 마치 얌전한 비글 같지만 실은 엊그제도 군입대를 하루 앞둔 형아의 치아 유지장치를 씹어먹었으니 결코 해피앤딩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슬아슬한 동거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기에 우리가족도 꾹이의 특성을 천천히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있고, 꾹 역시 이런 주인을 만난 제 운명을 받아들인 것인지 우리 집의 규칙에 하나씩 적응해나가고 있는 단계다.

요런 규칙.. 신발에 똥 안 싸기 뭐 이런거..

다시, 지랄견

'지랄견'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그 또는 그녀는 지랄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하며 에너지 넘치는 견종인 비글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 거라고 무릎을 쳤을 거다! 그러나 하필이면 비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이 단어가 비속어였고, 모든 비속어가 그렇듯 단어가 품고있는 강렬하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함께 따라왔다.

그래서 비글은 지랄견이라고?

꾹이의 사진만 보더라도 명백히 지랄맞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비글에게 '지랄맞다'고 손가락 질 해도 될까? 태생이 활동적이고 발랄하며 놀기를 좋아하도록 태어났다는데,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고 애교도 많다는데 누가 이 '해맑음'을 나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감히 제안해본다. 부정적인 어감의 '지랄견'보다 '똥꼬발랄견' 정도로 바꾸어 불러보는 건 어떨까. 그냥 발랄견-이라 하기에는 꾹이처럼 그 정도가 좀 지나치는 경우가 있으니 양심상 똥꼬발랄견, 좀 귀엽지 않은가!


똥꼬발랄견 비글에게 지랄맞다 욕하지 말아주세요!

똥꼬발랄 나 다시 보러 와줄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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