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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꾹이누나 Dec 19. 2018

몸에 똥칠하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 이 글은  이야기입니다. *

식사를 하고 계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누르시거나 나중에 소화가 다 된 후에 읽어주세요. 여러분의 비위는 소중하니깐요.


나는 비위가 약한 편이다

반려견과 함께하면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있다. 배변훈련하던 몇 개월 간 매일 아침 집안 곳곳에 남긴 제 흔적을 치울 때가 그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남의 오줌똥을 어떻게 만질 수 있냐고 호들갑 떨다가도 어느 새 감정없이 무표정으로 배변패드를, 혹은 산책길의 똥을 후다닥 치울 단계에 다다르곤 한다. 뭐, 시간 단축은 서비스다.


하지만 배변처리 정도는 코웃음을 칠 정도로 비위의 한계점을 건드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 내 욕 하는거 맞죠 그쵸?



신상 향수


언젠가 반려견계의 신, 강 선생님께서 산책길의 고양이 똥은 강아지들에게 마치 '신상 향수'와도 같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인간보다 민감한 후각을 가진 강아지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꾹이가 산책길에 이상한 지점 - 가령 누군가 뱉은 침이라던가 지렁이, 진흙, 고인 빗물 등등 - 에 몸을 사정없이 비비면 산책 후에 샤워가 걱정되어도 그냥 '향수 많이 뿌리렴'하고 충분히 즐기게 내버려뒀다.


그게 화근이었다...


갑분뒹굴뒹굴
아 좋은 비보잉이었다..!



똥을 먹는 강아지


인스타에 가끔 '우리 강아지는 자기 똥을 먹어요'(생각보다 많다ㅠㅠ)라는 슬픈 이야기가 들려올 때면 그래도 꾹이는 깔끔한 스타일이라서 똥은 안 먹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꾹이는 배변패드에 2~3번의 흔적이 있다면 그 배변패드는 쓰지 않는 나름의 결벽증도 있으니깐.


가을의 산책길이었다.

낙엽이 소복히 쌓인 길을 꾹이는 신이나서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그러다 목적지에 다다라서 길 가에 쌓인 낙엽을 향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또 침이나 뱉었겠지


아, 나는 너무 안일했다.

꾹이가 낙엽더미에 몸을 힘껏 비비는 걸 귀엽다고 사진까지 찍었다. 한동안 향수파티를 즐기던 꾹이가 충분히 즐겼다며 몸을 홀연히 털고 앞으로 향했다.


문제의 그 장면


어디선가 똥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똥냄새지, 하면서도 그때까지 그 냄새의 출처가 꾹의 몸뚱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꾹이에게 산책길 간식을 하나 꺼내주려고 "앉아!"를 외친 순간. 
꾹이 목덜미에 처음보는 갈색 자국이 보였다.


똥이었다.


맞습니다 거기에요 여러분의 시선이 꽂힌 그 곳



누가 산책길에 똥 쌌어


순간 기겁을 했고, 냄새의 수준로 보아 밖에서 수습이 불가한 수준이었다. 분명 꾹이가 싼 똥은 아니었고, 나의 2x년 데이터베이스로 분석하건데 개똥의 냄새도 아니었다.
(생각 하기도 싫다.)


꾹이는 집에 돌아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처음 맡아본 '신상 향수'를 몸에 듬뿍 뿌리고 가는 기분이란..! 다행히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길이라 지나가는 이들의 후각은 지켜줄 수 있었지만, 정말 생전 맡아보지 못한 진하고 오래가는 대변의 냄새에 정말 코피가 날 뻔 했다.


15분을 걷고, 또 밀폐된 엘리베이터에서 15초간 화생방 간접경험을 한 끝에 집에 도착했다. 샤워를 3번이나 했지만 진한 향기는 빠질 줄을 모르고, 결국 아로마 오일 몇 방울을 뿌려가며 털을 말렸다.


그래도 냄새나서 베란다로 쫒겨남.jpg



몸에 똥칠할 때까지


샤워 후에도 하네스 빨래를 통해 한 번 더 인생 대 위기가 찾아왔다. 물로 씻고 눈에 보이는 아무 세제들로 빨고 또 빨아도 진한 향기는 빠질 줄을 몰랐다. 눈물을 머금고 인스타 동지들에게 고견을 물으니 베이킹 소다를 듬뿍 뿌려놓으면 '그나마 낫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놀랍게도 수 많은 동지들의 댓글들이 이어졌다.

[저희 개도 똥칠 해봄]

[첫째는 안 그랬는데..]

[그거 냄새 진짜 오래가요!!]


똥칠을 한 번 겪고나니 꾹이가 산책길에 부비부비하는 순간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똥만 아니면 돼'라는 인자한 마음가짐도 생겼다. 뒹굴기를 시작하려 하면 먼저 냄새를 확인하고, 똥이 아님을 확인한 뒤 오히려 더 부비고 놀게 해주는 여유!


이제 벽 아니 '몸'에 똥칠까지 했으니 더 오래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너는!


며칠전 또 뒹굴뒹굴 했지만 다행히 똥은 없었습니다!





...뒷 이야기


일주일간 문제의 똥사건이 있었던 산책길 근처도 못갔는데, 트라우마(?)를 이겨내고자 하는 심산으로 일주일 뒤 꾹이와 함께 그곳을 찾았고 꾹이는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아주 잘 놀다가 왔다고 한다. 

써글놈.


일주일 뒤
저는 기부니가 너무너무 됴하요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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