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리턴즈>를 보고 나서 쓰다.
KBS 다큐인사이트 <트럼프 리턴즈>가 지난 7월 18일 공개됐다.
매주 목요일 저녁 방송되는 KBS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다큐 인사이트>는 나 같은 상업방송의 다큐멘터리 연출가에게 많은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공영방송인 KBS는 연출가가 수신료라는 안정된 공적 재원으로 긴 시간을 투자받아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물론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요즘 시대에 충분한 돈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방송 다큐멘터리 시청률이 0%로 수렴하는 시대, 그래서 광고가 전혀 붙지 않고 수익이 거의 없기에 만들수록 손해를 보는, 그래서 제작 기회가 점차 축소되고 있는 지금에는 드문 기회이긴 하다.
경쟁사의 경쟁 프로그램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다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KBS 다큐 인사이트를 즐겨 본다. 다음날 성적표(시청률표)를 보면 안타깝게도 0에 가까운 2049 시청률을 기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정말 만든 사람이 자신의 작품이 다루는 대상을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만들었다 싶은 작품들도 많다.
트럼프 리턴즈
대상을 사랑해서 만든 건 아닌 게 확실하지만 - 대상이 트럼프이므로 -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 다큐 인사이트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한다. 트럼프 피격 직후인 7월 18일에 시의성 있게 방송된 <트럼프 리턴즈>다.
KBS에만 있는 부러운 제도인 ‘PD특파원’으로 미국에 가 계신 이윤정 피디님이 만든 작품이다. 인터뷰 사용에 일부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정말 꼼꼼하게 취재하고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글로도 썼지만 미국인들 가운데 약 40% 가까운 사람들이 - 이면에서 국가를 움직이는 자본과 좌파 엘리트들의 비밀 조직 - 딥 스테이트가 실존한다는 음모론을 믿는다.
국가를 움직이는 딥 스테이트가 조직적으로 트럼프를 박해하지만, 그는 탄압을 굳건히 돌파하고 엘리트들이 만든 법질서를 비웃으며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펼칠 것이라는 믿음... 이것이 이른바 MAGA 세계관이다.
웃기는 것은 그 서사의 주인공이자 탄압받는 ‘약자’가 미국 기득권 중에서도 슈퍼 기득권이자 울트라 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는 트럼프라는 것이다. 세상을 바꿔온 것은 이야기의 힘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면 적절할 것 같다.
트럼프의 이야기는
어떻게 믿음을 얻었나?
하지만 어떤 이야기가 힘을 얻는 데는 그만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미국 민주당은 소수자와 약자를 차별하면 안 되고, 곤경에 처한 세계의 이웃 국가를 도와야 하며, 약자와 서민을 위한 사회복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상식적이고 올바른 입장을 내세워 흑인과 히스패닉, 진보적 미국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해 왔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을 도와 가자 지구의 학살을 방치하고, 난민을 막지 않는다면서 러스트 벨트의 가난한 실직자들에게는 대책이 없고, 2024년 전 세계에서 가장 호황을 구가하는 경제를 이루었지만 소수의 빅테크 종사자들에게나 돈잔치가 벌어졌을 뿐이었다.
이런 경제적 고통을 겪는 서민들 입장에서는 민주당이 내세운 올바른 이상이 그저 '선비질'일뿐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소수자나 약자를 차별한다고 사회적으로 쓰레기 취급을 받자니 화가 치밀었다.
그런 분노가 어떤 카타르시스 넘치는 이야기를 갈구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눈부신 제조업 성장과 함께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했으나 이제는 소외되고 버려진 자신들, 때로는 국경을 넘어오는 난민들만큼의 관심도 국가로부터 받지 못하는 듯한 백인 노동자들, 그들에게는 트럼프가 펼쳐놓는 '부유한 엘리트들에 대한 복수'의 이야기가 구원의 서사였던 셈이다.
PC함은 유능한가?
트럼프가 성폭력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도 그게 엘리트들의 탄압이라 믿는, MAGA 세계관을 믿는 극우 집단은 우리나라의 상식적인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좀 기괴하고 굳이 이해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탄생 과정은 앞서 적었듯 인간 사회의 역학을 이해하는 단서를 주고, 우리나라에서 자질 없는 지도자가 선출되는 과정을 돌아보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그간 국내에서 트럼프의 탄생배경을 계급적으로 분석한 책도 있고 칼럼이나 기사들도 많았다. 대부분 미국 기사, 미국 싱크탱크의 연구 등을 재료 삼아 가공해서 자신의 주장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런 것들은 분석 대상(트럼프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직접 접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모사품 같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반면 이 다큐는 좀 무서워 보이기까지 하는 미국 극우 시민들, 빈민들 틈으로 깊게 파고 들어간다.
이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서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장면이 나는 가장 인상 깊었다.
혹시 총이라도 꺼내려는거 아냐? 하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찰나, 텅- 빈 청바지 주머니가 나올 때, 저 남자의 슬픈 표정과 뒤이어 나오는 귀여운 딸, 그리고 허름한 이동식 주택과 거기 거주하기 위해서도 주차료 120만 원을 매달 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때... 그리고 바이든이 "우리는 사상 최고로 강력한 경제를 만들었다"며 자랑스럽게 활짝 웃을 때..
트럼프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이런 기만적 사회의 결과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PC)과 좋은 정치 사이에는 아득한 간극이 있다는 이해가 밀려온다.
저들도 '우리'인가?
성소수자나 난민, 이주민처럼 주류의 특성과 다른 낯선 소수 집단은 곧잘 괴물이나 오염된 존재로 간주된다. 한편으로는 평균적인 상식을 가진 시민들이 극우 집회를 봤을 때도 비슷한 감상을 얻게 된다. 우리 중의 일부가 아닌 어떤 쓰레기들을 모아놓은 섬 같은 느낌으로 그 집단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집단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그들이 처한 사실을 취재를 통해 확보하고 알려내는 것. 그래서 그들의 납작했던 몸에 숨을 불어넣어 입체적인 인간으로 재구성하는 것.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 우리 중 일부의 다른 얼굴임을 밝혀내는 것.
거기에 저널리즘의 기본이 있고 희망도 있다.
에스노그라피적 접근으로 새로운 문화를 탐구하는 인류학자처럼 이 작품의 피디는 그런 존재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렇게 편견을 깨부수게 해주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건네준다.
이 다큐가 좋았던 분들은 넷플릭스 <아메리칸 팩토리>도 보시면 좋을 것 같다. 미국 러스트 벨트에 들어온 중국 공장에서 일하는 미국 노동자들의 이야기인데,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들었고 여러 사람들의 삶을 보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다 보고 나면 생각거리가 쌓이는 수작이다.
KBS 다큐 인사이트 시리즈 중에도 <아메리칸 팩토리>라는 (제목만 따라한) 작품이 있는데 (미국 출장은 왜 갔나 싶게) 핵심 소재에 대한 취재가 거의 되지 않은 수박 겉핥기 같은 작품이니 혼란 없으시기를..☀︎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