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안 해도 괜찮아

연애 지상주의자가 27년 차 모쏠에게 하는 질문

by 양유정

아무리 친하고 편한 사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거리는 지켜야 합니다. 하다 못해 20년 지기 친구 사이라 해도 그렇죠. 어쨌든 '남'이니까요. 그런데 연인이라는 관계는 사뭇 다릅니다. 애인도 분명히 남인데, 훨씬 허용되는 범위가 넓은 것 같아요. 나이에 맞지 않게 땡깡을 부린다든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엉엉 울어버린다든가. 연인 앞에서만큼은 꾸며내지 않고 솔직하게 행동할 수 있으니까요.


그동안 제가 쉴 새 없이(?) 연애를 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어른스러운 척,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제 못난 모습까지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긴다는 게 좋았습니다. 또 시시한 제 일상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인 양 들어주는 것, 잘잘못 따지지 않고 무조건 제 편이 되어 주는 것도 좋았고요. 물론 이런 걸 노리고 연애한 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사랑을 주고받는 그 자체에서 큰 기쁨을 느꼈거든요. 특별한 날엔 꼭 서로를 만나서 기념하고, 서로의 일을 내 일처럼 응원해주고, 서로를 위한 선물을 사고 편지를 쓰고. 연애는 우리를 자주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잖아요. 이렇게 짜릿한데 어떻게 연애를 멈추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별할 때마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노라 큰소리쳤다가도 금방 다른 연애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주변에 꼭 한 명씩은 연애를 '안 하는' 친구가 있더라고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K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저랑 같이 아나운서를 준비했던 친구인데요. 외모도 훤칠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녀인데, 무려 모쏠이래요. 분명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지켜본 몇 년간 연애 소식이 없더라고요. 도대체 왜? 연애하는 거 이렇게나 좋은데!


그래서 오늘 질문합니다. 연애 만능주의, 연애 지상주의자인 제가, 27년 차 모쏠 K에게.



Q. 정말 모쏠이야?

A. 음... 고등학교 때 딱 한 번 해봤는데 친구들이 그거 연애 아니라던데. 그거 빼면 모쏠 맞아.^^ 그 당시에는 멀쩡한 애가 나한테 고백하길래 그냥 나도 좋다고 한 것 같아. 주변에서 친구들이 더 난리 치니까 분위기를 탄 것도 있고. 근데 아마 나도, 그 친구도 서로 '사랑'한 건 아니었을 걸?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조금 더 친한 친구 정도였던 거 같아.

Q. 그럼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건가?

A. 지드래곤을 사랑했었고, 지금은 방탄소년단을 사랑해... 근데 이건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이랑은 좀 다른 거잖아. 연애하고 싶은 열렬한 감정이 드는 그런 사랑은 해본 적 없는 것 같아.


Q. 그동안 연애를 왜 안 한 거야? 사랑하는 감정이 안 생겨서? 아니면 연애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

A. 둘 다인 것 같아. 오늘만 해도 그래.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해 먹고, 운동하고, 야구 보고, 서류 마무리하고, 오디션도 지원하고, 책도 좀 봐야 되는데 연애를 할 시간이 어딨어? 더군다나 나 K-장녀라 꽤 독립심이 강한 편이거든. 웬만한 건 혼자 다 할 줄 안다고 착각(?)하면서 씩씩하게 살고 있어. 연애를 해야겠다는 대단한 필요성은 못 느껴본 것 같아. 그래도 엄청 맘에 쏙 드는 사람이 있었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연애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결론적으론 그만한 사람을 아직 못 만난 거지.


Q. 앞으로도 연애할 생각이 없는 편?

A. 내가 좋아서 미칠 것 같은 사람이 나를 미치도록 좋아해 주지 않는 이상 못 할 것 같아.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서로 좋아서 미치는 연애가 아니라면, 싱거운 연애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달까. 그래도 주변에서 소개팅도 많이 시켜줘서 열심히 했어! 코로나 전에는 분기 별로 한 번씩은 한 듯? 근데 다 잘 안 됐어. 사랑하는 감정이 안 생겼거든. 대시도 꽤 많이 받은 것 같은데 보통 내가 눈치 못 채고 있다가 다 지나간 다음에 주변에서 몰랐냐고 그러더라. 나는 대놓고 고백하는 거 아니면 잘 모르겠더라고.


Q. 연애 안 해도 괜찮아? 나는 연애하지 않을 때 너무 외롭고 허전하거든.

A. 응. 나는 내가 이루고자 한 것을 성취하지 못했을 때 우울한 적은 있지만 연애를 못해서 고민해본 적은 솔직히 없어. 연애를 하든 안 하든 나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지금까지 연애 안 하고도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아왔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어. 그리고 원래 있다가 없으면 허전한데, 계속 없었어서 허전하거나 외롭다는 생각도 안 드는 것 같아.


Q.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잖아. 그럼 '이대로 연애하지 않고 사는 것'과 '그래도 한 번쯤 제대로 연애를 해보고 싶은 마음' 중에 어떤 게 더 커?

A. 사실 그런 고민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로 별로 연애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근데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조바심이 나는 것 같아. 정신 차려보니까 나 은근 나이 많더라고. 요즘 아빠도 나 결혼 못 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고. 예전엔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요즘 가치관이 좀 변하고 있긴 해. 연애 안 해도 충분히 잘 살고 있지만, 남들 다 하는 걸 못하면 쫄리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그래도 아직은 연애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연애란 건 돈도 시간도 많이 필요한데, 나는 지금 여유가 없거든. 여유 없이 연애를 시작하면 내가 상대한테 짐이 되거나 상대가 짐처럼 느껴질 것 같아.


Q. 그래도 연인들이 부러울 때가 있지?

A. 완전 있지. 온전한 내편이 있는 거잖아. 친한 언니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혼인 신고를 먼저 하고 지금 같이 살고 있거든? 남자친구랑 같이 살면 뭐가 좋냐고 물어보니까 '집에서도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하더라.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라서 공감을 못했는데 언니가 행복해 보여서 조금은 부럽기도 했어.


Q. 혹시 비혼주의?

A. 그러고 보니 나는 결혼에 대한 것도 비혼에 대한 것도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네. 연애를 안 해서 그런가? 그래도 우리 가족이 화목한 편이라 결혼한다면 나도 화목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엄마 아빠가 결혼하지 않고 개인의 시간에 더 투자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 만약 그랬다면 부모님도 좀 더 많은 도전을 해보고 꿈을 이루지 않으셨을까? 결혼하면 개인적인 꿈은 많이 희생해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언젠간 나도 결혼과 비혼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분명 올 텐데,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어.


Q. 밸런스 게임해보자. 꿈 vs 연애(스쳐가는 연애가 아니라 소울 메이트랑 하는 연애),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

A. 난 고민도 안 하고 꿈. 이루고 싶은 게 너무 많거든. 근데 나한테는 연애도 일종의 꿈이야. 언젠가는 꿈같은 연애를 해보고 싶기도 해. 나에게도 그런 사랑이 찾아오겠지?


Q. 연애를 못 해서 조급해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그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해줘.

A. 이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연애까지 애쓰면서 스트레스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인연은 좀 늦게 오겠거니~ 이렇게 생각하면서 흘러가는 대로 살면 어떨까?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반짝반짝하고 예쁜 사람들이니까.




K를 인터뷰하면서 느낀 점은, 그녀가 모든 면에서 '충분한' 사람인 것 같다는 사실이었어요. 가족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충분히 매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요. 그동안 연애 안 하고 살아도 잘- 사는 친구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는데,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이제야 알게 됐어요. 감정적으로 부족하지 않으니 굳이 인생에 '연애'를 더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찐 사랑'을 찾아 헤매던 과거의 제 모습을 새삼스레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내면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그렇게 쉴 새 없이 연애했던 건 아닌가 싶더라고요. 제 친구들이 왜 그렇게 연애 공백기를 가져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뭐든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기 때문이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건 연애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어떤 방식으로든 충분히 행복하게 살면 그것으로도 잘 살고 있는 거예요. K처럼 친구들과 일로부터 마음을 채워도 되고, 저처럼 감정적으로 진하게 교류할 애인을 만나도 되고요. 다만 저는 연애하는 거 적극 추천해요. 아까도 말했듯이 정말 짜릿하거든요! 아무리 K가 충분히 행복하더라도 다른 종류의 행복을 느껴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해요. 나랑 아무런 관련 없이 2n년을 살아온 사람과 하나가 되는 기분도 신기하고요. 부모님 말고 나를 이렇게나 예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거든요. 그나저나 제가 보기엔 K는 충분히 연애할 준비가 된 것 같아요.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K 스스로 심적으로, 물적으로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될 때 K를 듬뿍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앞날에 어떤 연애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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