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26주 차. 오, 늘, 산책

걸을수록 가벼워져서

by 시애

저녁을 먹고 나서 오늘도 사부작사부작 밖으로 나선다. 임산부에게도 운동은 필요하니까요. 본가에 간 날은 강아지와 나가기도 하고, 너무 춥거나 비가 쏟아지는 날은 아파트 지하의 헬스장에서 잠시 걷기도 한다. 수영도 임산부에게 좋은 운동이라지만, 이전에도 안 뜨던 내 몸이 10kg 더 무거워진 와중에 갑자기 뜰 리가 없지. 요가나 필라테스도 많이 하신다던데, 이석증을 고쳐 준 의사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 했어.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나는 오로지 걷는다. 오만 생각을 초단편적으로 떠올리며, 아무튼 걷는다. 천천히.





문보영 시인은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가장 치열하게 듣는 행위’가 일기라고 했다. 나에게는 그게 산책이다. 눈앞에 글자나 영상이 없고, 손에 무엇도 쥐여 주지 않아야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어준다. 이 산만한 친구는 내일 할 일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고양이를 구경하고 뜬금없이 태아에게 말을 걸다가 노래 가사를 반복 재생하기도 한다. 유심히 들어봐야 별 소용이 없으므로 간간이 대꾸해 주면서 지껄이는 양을 흘려듣고 있으면 간혹 쓸 만한 얘기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럴싸한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거기에서 연상된 또 다른 생각이 불쑥 탄생하므로, 집에 돌아오면 남아 있는 것은 괜찮은 생각이 났었다는 인상 정도다.



그런데도 출발 전에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을 신발을 벗으면서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 희한한 일이다.



왜일까. 이게 옛 성현들이 말씀하시던 산책과 사색의 효용, 그런 걸까. 잘 모르겠다. 걷는 동안 뇌세포가 풍경을 구경하며 펀둥펀둥 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을 하고 있겠거니 할 뿐이다. 의자에 앉아서는 간곡히 타일러도, 넌지시 협박해도 널브러져 있던 뉴런이 엉덩이를 떼면 의욕이 나나 보다. 나는 시냅스가 발바닥에 있는 종류의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그리움이었다. 몸속 외로움 수용체에 문제가 있는지 혼자 살던 때의 나는 외로운 대신 끝없이 그리웠다.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뜨겁게 그리웠다. 뜨거워서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다 마침내 신발 안에 발을 구겨 넣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걸을 수 있는 최고치의 속도로 걸었다. 그리움이 날 좇아오지 못하도록 걸었다. 좌심방 우심실이 격렬하게 시위하는 소리를 들으며 걷고 걸었다.



절로 연소하던 그리움이 마침내 재만 남고 난 뒤에도 ‘걷는 습관’만은 온존하다. 여전히 나는 걷는다.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걷다가 배가 뭉치면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길가 벤치에 털썩 앉아 쉬기도 한다. 이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곳곳의 벤치가 어찌 이리 크게 보이는지.






그때보다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조금 가벼워진 채로 걷는다. 아니다. 가벼워지기 위해 걷는다. 마음이 술렁술렁 요동치는 시간은 세금 고지서처럼 지금도 잊을 만하면 불쑥 찾아온다. 술렁이는 마음을 신발 안에 구겨 넣고 밖으로 나간다. 내 감정에 개의치 않고 무심하게 평화로운 것들이 거기 있다. 아무렇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들을 구경하며, 걷는다. 호르몬을 핑계 대며 심통이 더덕더덕 양 볼에 붙은 날에도 걷고 있는 동안에는 무언가를 부러 망치기도 쉽지 않다. 걸으면서 할 수 있는 건 한 걸음 더 걷거나 두리번거리며 풍경을 살피는 것 정도다. 걷는 동안 나는 안전하다. 나는 아무것도 망치지 않고 출발했던 장소에 다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정한 리듬으로 발을 옮기면 땅도 일정 박자로 나를 토닥여 준다. 일정 박자로, 괜찮다, 괜찮다, 뭐 어때, 그만하면 잘 버티고 있어. 걷고 있는 나는 스스로를 너무 크게 망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걷고 있는 나로 인해 완전히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뭐 어때. 오늘도, 어쨌거나,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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