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언니'라 불리고 싶긴 하다만.
다음 주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휴가를 떠난다.
개헤엄 치며 물속을 구경하거나 튜브에 몸을 맡기고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설레어지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은 조용한 아침 테라스에서 즐길 독서 시간이다.
준비물은 '읽을 책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눈부신 바다와 파도소리를 곁들여 책을 읽는 행위가 얼마나 큰 힐링이 되어주는지 해 본 사람을 알 것이다.
한창 휴가지에서 책 읽는 것에 재미 들렸을 때는 3박 4일 동안 2.5권의 책을 읽기도 했다.
이번엔 소설책 한 권과 에세이 한 권을 챙겨갈 계획으로 책장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았다.
읽지 않은 책이 몇 권있긴 하다만 휴가지에서 읽을 책으로 썩 끌리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몇 권의 책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은 다음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보문고에 들렀다.
휴가지에서 읽을 책을 선정함에 있어 그립감도 중요하기에 직접 책을 만져보고 결정하고 싶었다.
도서 검색기를 통해 책의 위치를 찾아보고 읽고 싶었던 소설책이 '아동문학'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었다.
"순수한 감동을 느끼고 싶을 땐 아동문학만 한 게 없지!"
지쳤거나 힘들 때, 위로받고 싶을 때 만화책이나 그림책, 동화책을 즐겨본다.
이 책들은 다 아는 쉽고 당연한 이야기라 착각하며 근사한 것만 쫓고 사는 나에게 '기본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 울림이 너무 좋다.
잘 가지 않던 2층 저학년/고학년 동화책 코너에 들어섰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로 시끌벅적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없었다.
다른 코너의 책들 비해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의 두께는 얇았고, 표지는 형형색색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ㄱ,ㄴ,ㄷ,ㄹ 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책들을 오른쪽 검지 손가락으로 훑어가며 집중해 책을 찾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당연히 나는 아닐 거란 생각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꽤 가까워진 거리에서 다시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혹시나 해서 뒤돌아보니 단발머리의 40대 여성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저요?"
"저, 어머니 아닌대요?"
단발머리의 40대 여성은 네가 어머니가 아닌데 왜 아동문학 코너에 있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동문학 코너에 있으면 다 어머니냐고 반문하는 눈빛으로 나도 직원을 쳐다보았다.
"아? 결혼 안 하셨어요?"
"네."
"아고고, 죄송해요. 난 또 자녀 책 고르러 오신 분인 줄 알았네요."
"아, 네."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 다시 책 찾기에 열중했다.
어? 이상하다?
예전 같았으면 엄청 기분 나빴을 텐데, 오늘은 '어머니'라는 불림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지 않았다.
"난 여자들이 바로 화나게 할 만한 강력한 한 방을 알고 있지!"
"그게 뭔데?"
""어이~아줌마!" 이 한 마디면 백이면 백 모든 여자들이 다 화가 나지."
"그럼 나도 "어이~ 아저씨!"라고 부르면 되지!"
"백날 '아저씨'라 불러봐라 남자들이 꿈쩍이라도 하나. 남자들은 '아저씨'라 불려도 그렇게 발끈하진 않아."
그러고 보니 '아저씨'라 불려서 기분 나빠하는 남자들을 본 적 없긴 하다.
J는 늘 여자를 쉽게 열받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며 기세등등해했다.
나 놀려대는 재미에 사는 J에게 '반응해 주지 말자'라고 아무리 다짐해도, 깐죽대며 '어이 아줌마'라 부르는 그 한마디에 다짐은 와장창 무너진 채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열받아 두 주먹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뭘로 불리든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잠투정으로 울어대는 9개월짜리 조카를 들쳐 안고 동네를 돌아다니다 들은 '애기 엄마'라는 호칭에도,
버스에서 하차벨을 대신 눌러 달라며, 나를 부르는 학생의 '아줌마'라는 호칭에도,
오늘 서점에서 들은 '어머니'라는 호칭에도,
불 같은 성격에 제일 갖기 힘들었던 '그러려니'라는 마음가짐을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갖게 된 것일까?
이제는 오히려 옆에서 함께 듣고 있는 엄마가 더 정색한다.
"어머, 얘 애기 엄마 아니에요. 고모예요. 고모. 얜 아직 결혼도 안 했다고요."
저기... 엄마,
굳이 그렇게 내 신상을 다 털어가며 일면식 없는 남에게 '애기 엄마'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