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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Nov 28. 2023

어지럽거나 혹은 쓰러지거나.

복약안내서의 말 _016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제 또래라면 누구나 초등학교(사실 국민학교였지만) 아침 조회 때 운동장에 서 있다가 쓰러지거나 혹은 쓰러지는 사람을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저는 주로 쓰러지는 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멀쩡하게 서 있지만 햇빛이 점점 내리쬐면 머리 꼭대기가 뜨거워지다가 어느 순간 속이 메슥거리며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곤 했지요. 그럴 때는 꼭 배가 살살 아프고 설사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내가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소심하지만 어릴 때는 훨씬 더 수줍어서 다들 모여 있는 자리에서 번쩍 손들고 "선생님,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같은 말을 하는 건 꿈도 못 꿨습니다. 머릿속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더운데 추운데 덥고, 얼굴에서 핏기가 쏴아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아, 주저앉을까, 도저히 안되겠...' 하는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블랙아웃. 그대로 쓰러졌었다는 건 몇 초 후 갑자기 정신이 들면서 깨닫게 되지요. 


     그대로 끌려나가 잠시 양호실에 누워있으면 몸 상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지곤 했습니다. 가끔은 토사곽란이 난 사람처럼 토하고 설사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지요. 안 그래도 주목받는 걸 잘 못 견디는 성격에 전교생의 이목을 끌어 스트레스받는데, 큰 병이라도 있는 양 픽 쓰러져놓고 금세 멀쩡한 게 어쩐지 좀 머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누군가 좀 쓰러져주어야 "에, 또, 그리고..."로 이어지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조금 빨리 끝나기도 했을 겁니다. 조회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는 인간 알람인 셈이었지요.


     그때는 왜 그러는지 몰랐고 거기 어떤 원인이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못했습니다. 어른들도 그냥 몸이 약한가 보다 정도로 바라보는 것 같았어요. 그 증상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입니다. 실신 중에서도 가장 흔한 유형으로 알려진, 미주신경성 실신입니다. 




    어릴 때만큼 자주는 아니었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종종 비슷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주로 등교하거나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였지요. 어지럽고 숨이 차고 쓰러질 것 같은데 미처 앉을자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지하철에서 뛰쳐나와 대합실 의자에 한참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아있기도 했지요. 안 그래도 빠듯한 아침 시간에 전철역에 주저앉아 있노라면 지각한 김에 결석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습니다. 가끔 '내가 학교(회사)에 가기가 너무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미주신경성 실신은 신경심장성 실신이라고도 합니다. 원인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극심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긴장 상태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혈관이 확장되고 심장 박동이 느려지는 서맥이 나타나면서 혈압이 낮아지는 현상이 갑자기 나타나면 급격히 낮아진 혈압 때문에 뇌로 가는 혈류량이 감소하여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처: N의학정보 서울대학교 병원 제공)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의 감정은 복잡했습니다. '내 증상을 이 사람(그게 누군데)이 대체 어떻게 알고 있지!' 하는 당혹스러움, 그냥 몸이 약한가 배가 아팠나 정도로 심상히 넘겼던 증상에 이렇게 그럴듯한 이름이 있다는 이상한 뿌듯함(꾀병 아니라고!), 왜 나에게 유독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뒤엉켰지요. 내가 더 이상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는 안도감, 어딘가에 나와 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연대감까지 느껴졌습니다. 진단명이 갖는 힘을 느끼게 해 준 하나의 계기이기도 했지요.


    가장 흔한 원인은 역시 오래 서있는 것입니다. 고열이 노출되거나 피를 보는 것일 수도 있고 정맥채혈을 하는 와중에 쓰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극도의 피로나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하지요. 체질적인 경향성도 영향을 미칩니다. 원인이 되는 상황을 모두가 겪지만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이 증상을 한 번도 안 겪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겪는 사람은 거의 드물지요.




     알고 보니 정말 많은 것들이 설명되었습니다. 일시적인 저혈압으로 인한 뇌혈류 감소가 원인이라면 애초에 저혈압이거나, 기립성 저혈압으로 인한 어지럼증이 있거나, 생리 중이라 출혈이 빠져나가 저혈압 상태가 되었을 때에 증상이 더 쉽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저는 평소에도 저혈압이라 혈압을 잴 때마다 100/60도 채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생 아침에 잠에서 깨는 게 힘들어 아침형 인간은 꿈도 못 꿔봤지요. 보통 미주신경성 실신을 경험한 분들을 보면 가늘고 마른 체형에 창백하거나 근육량이 부족해 저혈압을 의심하게 되는 유형이 많지요. 이분들은 앉아있다 일어날 때면 눈앞이 까맣게 되는 기립성 현훈도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인지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평소 전혀 저혈압이 아니라도 생리로 출혈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누구나 일시적인 저혈압 또는 빈혈의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피로나 스트레스가 겹치면 혈압의 저하가 미치는 영향이 더 커지고 평소에 없던 어지럼증을 경험하게 될 수 있겠지요. 


     미주신경성 실신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거나 심각한 손상을 일으키는 일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은 어린 시절의 저처럼 휴식을 취하면 바로 회복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수시로 증상이 나타나면 삶의 질이 심각하게 손상되고 더 중요한 것은 쓰러지는 상황이 그 자체로 심각한 손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쓰러지면서 머리를 부딪치거나 낙상으로 인해 골절이 일어날 수도 있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발생한 손상은 생각보다 크고 결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일 때 잦았던 이 증상은 성인이 되고 나서 눈에 띄게 빈도가 줄었고 어느 해부터는 같은 증상으로 쓰러진 적이 전혀 없습니다. 나이가 들고 체중이 늘면서 전체적인 혈압이 조금씩 올라간 것이 아마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컨디션이 많이 떨어진 날이면 약하게나마 어지러우면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속이 메스꺼운 느낌이 드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바로 앉거나 누워서 쉬려고 노력하지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체중과 근육량을 늘리고 운동으로 혈관의 운동성을 늘려 혈압이 떨어지지 않도록 체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처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염분을 일정 정도로 섭취하거나 압박스타킹을 신어 하지 혈관이 확장되는 것을 막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지요. 

     



     미주신경성 실신은 어지럼증이 전조증상이 되는 상황입니다. 비슷한 경우로 빈혈이나 기립성 저혈압도 심해지면 실신으로 이어질 수 있지요. 실신 전에 느끼는 현기증은 보통 어지럼증 그 자체가 치료의 대상이 되는 현훈(vertigo)과는 조금 다릅니다. 회전성 현훈의 3대 원인은 이석증, 전정신경염, 메니에르 증후군으로 알려져 있고 평형을 담당하는 귓속의 특정 부위에 발생한 문제에 기인하지요. 미주신경성 실신이나 기립성 저혈압의 전조증상으로서 어지럼증은 혈압이나 순환 등 전신의 문제에 기인하고 있어 구체적인 치료법이 없고 체질과 체력을 개선하여 관리해 나가야 합니다. 


     쓰러지지는 않지만 비슷한 증상 중 하나가 편두통의 동반증상으로서의 어지럼증입니다. 편두통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머리의 한쪽만 통증이 있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고 여러 복합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수시간~3일까지 지속되는 편측의 박동성 두통입니다. 통증이 중심이 되지만 매우 다양한 증상을 동반해서 나타나게 되지요.  


     편두통은 우리의 뇌 중 뇌간(brainstem)이 활성화되어 감각이 과민하게 된 상태에서 발생합니다. 그중 평형감각도 역시 뇌간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편두통은 어지럼증을 동반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심지어 편두통으로 진단하지만 때로는 통증 없이 어지럼증만 단독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초등학교 정도의 연령에서는 편두통보다 오히려 어지럼증이 더 흔해 '학동기 양성돌발현훈'이라는 편두통의 아형으로 진단하기도 하지요. 역시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고 타고난 체질과 식습관, 생활습관, 주변환경 등 환경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지럼증은 흔한 증상이지요.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심한 어지러움은 바로 진단과 치료로 이어져 오히려 대처가 빠른데 가벼운 현기증이 반복될 때는 오히려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증상이 반복해서 나타난다면 몸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질병으로 진단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건강과 질병이 흑백이 아니라 스펙트럼이라면 우리 몸에 나타난 것 중 의미 없는 증상은 하나도 없답니다. 


몸이 보낸 메시지를 잘 읽는 것만으로도 내 몸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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