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빛, 대출에 관한 생각 : 여자
남편에게 돈에 관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 중 하나는 '빚도 자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 사람이 나를 놀리나 생각했다니까요. 아니, 카페인까지가 체력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빚이 재산이라는 말은 내 생전 처음 들어본다! 내가 아무리 숫자에 약하고 경제관념이 투철하지 못하기로서니 얼토당토않은 말로 사람을 농락하네. 내가 속을 줄 알고?!
결혼하던 해 저는 아직 한의대 본과 1학년이었습니다. 겨울에 결혼하고 당장 봄 학기 학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하던 자리에서 남편이 학자금 대출을 알아보자고 하길래 일단 알아나 보자 하고 사이트에 들어가 본 게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학자금 대출은 이자가 2% 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학자금 대출 이율이 2% 대라고? 그건 안 받으면 바보야!!"
"뭐가 안 받으면 바보야? 얼마가 됐든 다 빚인데 안 낼 수 있으면 당연히 안 내야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학자금 대출이라서 그 정도인 거야. 요즘 이율이 얼마나 비싼데! 2%면 거저야! 혜택을 누려야지."
"어쨌든 2% 이자를 내야 하는 거잖아? 대출을 안 받으면 0%인데?"
"그 돈을 저금한다고 생각해 보면 이자가 얼마고.... (사실 여기서부터는 설명을 다 이해하지 못해서 기억도 안 납니다)... 그니까 대출을 받는 게 합리적이야. 내 말이 틀려?"
"뭭웱켍똻뵎놽??"
어느 한 구다리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없어서 고장이 나고 말았던 그 기억의 끝에는 아는 게 없어서 반박할 말도 없었던 제가 있었습니다. 씩씩거리면서 '이게 만약 패션이나 건강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내가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었는데!' 따위 생각만 맴돌았어요. 뭔가 분명히 아닌데 뭐가 아닌지 말을 못 해 억울했지만 저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렇게 당당하게 할 때는 뭔가 있긴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신 아버지의 외벌이가 먹여 살린 여섯 가족의 일원으로 자랐습니다. 낮은 직급부터 시작해 착실하게 호봉을 쌓고 승진 시험을 치르며 지방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저렴한 물건을 사러 저 멀리 도매시장에 시내버스를 편도 한 시간 반씩 타고 다니기가 매일 같았던 어머니 밑에 옹기종기 한두 살 터울의 네 입이 뻥긋거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엄마이자 가장이 되고 보니 더 상상이 안 되는 그 무게는 그대로 집안의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크게 벌지는 않지만 크게 잃을 일도 없는 경제관념이 뿌리내렸지요.
그런 우리 가족에게 '빚'은 지옥에서 온 뿔 여섯 개 달린 악마의 자식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먹고살기 위해 악마의 손을 빌리더라도 어떻게든 이 악물고 갚아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마땅한 악의 근원. 저와 언니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돈을 함부로 빌리지 마라, 보증을 절대 서지 마라, 가족 간에 금전 거래는 하지 마라, 같은 말을 숨 쉬듯이 듣고 자랐습니다. 제 기준에 빚을 진다는 건 목에 쇠사슬을 여섯 겹으로 감고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이미지였으니까요.
남편은 달랐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부모님은 잠실에서 큰 부동산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특히 어머님은 부동산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신 분이어서 그보다 훨씬 가난했던 시절에도 적은 돈으로 집을 사서 비싸게 파는 부동산 투자로 이윤을 크게 남기신 경험이 몇 번이나 있으셨다고 해요. 크건 작건 사업을 하는 집안의 분위기는 월급을 받는 직장인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걸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타고난 성향마저 쫄보 개복치인 저와는 달리 남편은 대담한 구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쓰는 즐거움을 안다는 데서 꽤 죽이 잘 맞는 소비메이트인데 쫄보인 주제에 슬금슬금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도 잘 모르는 저와는 달리 돈에 진지하고 진심이며 더 확고한 철학을 가진 것도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다툼에서 이길 재간이 있나요. 우리는 결국 학자금 대출을 진행했고 제 인생의 첫 대출을 받았던 날 저는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결혼 생활 10년을 지나면서 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가치관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함께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때 그가 말했던 '빚도 자산'이라는 말을 이제 조금은 이해합니다. 은행이 평가해 준 저와 제 라이선스의 가치가 아니었다면 이 일은 시작도 못했을 테니까요.
물론 아직 남편의 진도를 다 따라잡은 건 아닙니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 남편이 정부 지원으로 낮은 이율의 대출을 새로 뚫어올 때마다 '올해 내 할 일은 다 했다'며 의기양양해하곤 했거든요. 아니 대출을 더 받았다는 건 빚이 더 늘어난 것인데 그게 뭐 저렇게 신날 일일까 싶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건물을 사자고 얘기하면서 더 큰 대출을 일으키자고 눈을 반짝일 때면 머리가 아찔해지기도 합니다.
자영업을 계속하면서 돈의 무서움을 한층 뼈저리게 알게 된 일들도 생겼습니다. 돈 쓰는 재미를 알게 된 뒤에도 타고난 천성은 버리지 못해 크게 사고 친 적은 없던 저였는데 사업으로 사고 친 것처럼 느낀 때도 있었습니다. 십수 명 직원들의 월급이 밀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코로나가 창궐한 어느 달에는 월급날이 다가오는 게 무서웠습니다. 수년간 드림팀으로 합을 맞춰온 직원들이 일순간에 도미노처럼 퇴사 러시를 이루었던 때는 퇴직금으로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은행 잔고가 무서웠습니다. 그런 순간을 넘기면서 제 간의 크기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저와 비슷하게 남편과 게임회사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남편이 자꾸 어디서 돈을 빌려와서 의기양양해해. 이해가 안 돼!"
친구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습니다. "그 돈을 어디서 빌려왔대? 너네 남편 대단하다!"
알고 보니 친구네는 남편이 스페셜리스트, 친구인 아내가 제널리스트로 역할이 바뀌었던 겁니다. 게임 개발자인 남편이 안에서 투덜거리는 사이 친구는 월급날이 닥치면 어디서 돈 좀 급하게 빌려 올 데가 없나 고민했다는 거예요. 아, 너도 그렇구나. 그 자리는 그런 자리구나. 갑자기 이해의 폭이 넓어진 날이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돈에 대한 우리의 서로 다른 생각은 이것 말고도 있습니다. 남편에게서 '맨 아워(man-hour)'라는 개념을 저는 처음 들었는데 '한 사람이 1시간에 생산하는 노동 혹은 생산성 단위'를 의미하는 경제학 용어라고 하더라고요. 어디에 돈을 쓸지 결정할 때마다 그는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뛰어난 사람의 한 시간은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비싼데. 변호사의 맨 아워가 얼마인지 알아? 니 한 시간은 우리한테 돈 얼마보다 훨씬 가치가 있기 때문에 너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돈을 쓰는 건 당연해."
어릴 때부터 돈이 아까워서 뭐든 '그냥 내가 하지 뭐'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저였기에 시간을 아끼자며 대신 돈을 쓰는 남편이 때로는 과소비의 화신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창 일과 육아, 진료와 야근에 치여 바쁠 때는 제 체력을 아끼기 위해 당연하게 허락되는 소비가 그 어떤 지지보다 강력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시간을 가진 사람이 진짜 부자'라는 말도 그의 철학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지요.
함께 일을 시작한 이후로 남편은 그 어느 때보다 저의 체력과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 고민합니다. 돈을 쓰지 못할 때에는 자기 시간이라도 쓰면서요. "우리한테 너의 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의 자존감이 고원의 침엽수림처럼 아주 조금씩 자라나는 기분입니다. 가끔은 다른 생각이 더 좋을 때도 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