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최 Oct 13. 2024

P와 J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일에서의 소통과 공유 : 여자

함께 일하기로 결정하고 개원을 준비하던 어느 날, 남편은 메신저로 엑셀 파일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WBS라고 적혀 있는 파일을 열어보니 끝도 없는 할 일의 목록이 나열되어 있고 각 항목에는 하위에 딸린 세부 항목부터 각각의 담당자와 마감기한, 진행 중인지 마감되었는지 표시까지 기록하도록 되어 있더군요. 


     일단 저는 WBS라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work breakdown structure'의 약자인 것도 솔직히 지금 이 글 쓰면서 구글에서 검색해서 알았어요. 오, 뭔가 빠뜨리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거의 500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는 할 일들의 목록을 보니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숨이 콱 막혔던 것도 사실입니다.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엑셀칸 한줄한줄을 완료로 넘길 때마다 실제로 일이 진행되는 것 이상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남편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 WBS를 본 충격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는 말을 어디에서 읽었는지는 까먹었지만, 제가 충격을 받은 만큼 남편도 충격받은 저를 보고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겠지요. MBTI가 유행하기 전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파워 P와 울트라 J가 서로의 존재를 알아본 순간입니다.




그는 계획 세우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루 일과표를 짜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데 잘 되지 않으면 되는대로 그때그때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잘 수행할 수 있는 계획표를 다시 짜는 데에 또 시간을 할애합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계획을 세우다가 끝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운 계획대로 한동안 살긴 하는데 며칠 지나고 나면 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와서 말하지요. "이번에는 진짜 최적의 시간표를 찾았어!" 이 최적의 시간표가 아직 진짜 최적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맞추어 사는 그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습니다. 한번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꼭 그 일을 하려고 하고 하루에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만든 뒤 점수를 매겨 평가하기도 해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 나올 법한 일이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너무 계획적이라 어쩌다 한 절반쯤 계획대로 살지 못한 날이면 어차피 망했어! 이런 느낌으로 왁 무너져버릴 때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또 최적의 계획_최종, 최최종, 진짜최최종을 찾아 업데이트가 시작되곤 하더군요.


    제가 남편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것처럼 남편도 저를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계획이 없이 살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당치 않아요. 저도 물론 계획을 세웁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저의 계획은 큰 틀에서 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고 세부사항은 진행하면서 상황에 맞게 결정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지요. 그래서 가끔 해야 할 일들을 놓치기도 하기 때문에 남편의 씅에 차지는 않지요.


     남편과 저는 이십 대에 각각 혼자 유럽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남편은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여행의 계획을 꼼꼼히 세우고 관련된 자료를 모아 거의 책 한 권으로 만들어 갔고 계획을 하나씩 클리어하며 다녔다고 합니다. 저도 계획을 열심히 세우긴 했는데 막상 여행 가서는 계획대로 된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계획을 세울 때를 여행과 관련된 모든 순간 중에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 막상 여행을 가서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편이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모든 계획은 어긋나고 때로 낯선 사람들과 생각지도 못한 곳에 가있기도 했지만 저는 그게 진짜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생각해 보니 신혼여행에서 우리가 왜 그렇게 싸웠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MBTI의 맨 마지막 글자인 P와 J는 흔히 계획성의 유무로 분류하지만 '인식형'이냐 '판단형'이냐로 구분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합니다. 저는 일단 일을 진행시키고 상황에 맞닥뜨리면 그때그때 대처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식형, P)이고 남편은 어떤 일에 대해 먼저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원하고 미리 정보를 모아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판단형, J). 


     저는 일을 일단 시작하고 보기 때문에 겁이 없는 대신 실수가 많고 남편은 근거도 없이 지르려는 저를 보고 불안해합니다. 저는 막상 가보면 별 거 없을 것 같은데 애초에 모든 가능성과 위험을 미리 가늠하려고 하는 남편의 행동이 가끔 괜히 불안감만 더 주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재미있는 건 우리의 이 성향이 역전될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냥 일단 시작하고 보았던 저는 잦은 실수와 치밀하지 못한 성향에 대해 하도 지적을 받다 보니 계획적으로 가능한 일을 더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내린 인프피인 제가 얼마 전 우연히 다시 검사를 해보니 INFJ가 나오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던 적이 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더니 일을 잘하려고 내가 성격까지 개조한 건가! 


     반면에 남편은 책에서 스타트업은 의사결정이 빨라야 하고 많이 시도해 보는 것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글을 읽었다며 변화를 일으키는 어떤 결정을 갑자기 밀어붙일 때가 있었니다. 들어보고 예상 가능한 문제점이라도 제시하려고 하면 제가 마치 빠른 의사결정을 막는 빌런이라도 되는 양 한숨을 쉬곤 했어요! 내가 하면 섣부른 시도고 니가 하면 빠른 의사결정이냐!! 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습니다. 




     싸우긴 해도 저랑 똑같은 P가 우리 팀에 또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울트라 J의 존재가 내심 든든한 것은 사실입니다. WBS의 항목 500개가 질리긴 하지만 나 대신 우리 일이 빠짐없이 진행되도록 체크해 준 셈이니까요. 공공의 적과 싸우는 같은 편은 비슷한 사람 둘보다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둘인 편이 낫다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