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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백 17화

미안해요... 엄마...

고마워요... 엄마...

by 이숙재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치매가 날로 더 심해졌다.

어떤 날은 똥 기저귀를 간병인 얼굴에 던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요양병원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아님 불행인지 모를 연락이 요양원으로부터 왔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요양원에서 한 자리가 비었으니 1시간 내에 입소할 수 있냐는 연락이었다.

몇 년 전부터 엄마가 치매 양상을 보이면서 미리 물색을 해 놓은 요양원이었다. ‘요양원’이라는 단어 자체를 듣는 순간 가슴이 쓰리고 아픈 일이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전에부터 아주 좋은 곳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우리 모두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엄마에게는 요양원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마치 007 첩보 작전을 하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본능적으로 요양원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축 처진 어깨,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두 눈, 아래로 축 늘어진 입꼬리... 아무말 하지 않아도 엄마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치매 기가 종종 있긴 했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상황들을 눈치채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안해요... 엄마...!’

‘정말 이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애써 눈물을 감추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여기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워! 걸어서도 올 수 있어! 내일 또 올게! 엄마, 잘 자요! 내일 봐요!”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마치 원망 어린 눈빛으로 ‘너희들이 나를 버려! 이 괘씸한 것들!’하고 목놓아 울고 있는 듯했다.

마치

‘너희들 나 이곳에 버리고 가는 거지!’

‘너희들끼리 잘 살려고!’라고 눈빛으로 포효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엄마를 버리고 가는 자식에게 ‘나 이곳에 버리고 가지 마! 나도 데려가죠!’라고 외치고 싶지만, 자식에게 짐이 될까 봐 아무 소리 못하고 눈물을 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엄마를 버린 죄인이 되어 그 날밤 꼬박 눈물로 지새웠다.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엄마가 있는 요양원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반가운 표정보다는 마치 원망의 눈빛으로 쏘아보는 것만 같았다.

“엄마, 밥 먹었어?”

“안 먹었어!”

“왜?”

“나를 죽이려고 밥에다 독약을 탔을 거야!”

“엄마, 아니야! 여기 계신 분들 정말 좋은 분이야!”

“좋긴 뭐가 좋아!”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달래 보아봤자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요양원이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다음 날부터 한동안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주말을 이용해서 자동차로 엄마를 모시고 동네 한 바퀴씩 돌며 엄마를 안심시켜 주었다.

“어머니, 이것 보세요. 어머니 있는 곳과 집이 이렇게 가까워요.”

“엄마, 저기 보이지! 약국… 마트… 엄마가 다 다니던 곳이잖아. 엄마가 있는 곳도 바로 저기고. 정말 가깝지!”

“그럼요, 어머니. 언제든지 부르시면 달려올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워요!”

처음에 엄마는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한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엄마가 차 안에서 말했다.

“그러네. 가깝네, 가까워!”

“엄마! 저기 약국 보이지? 엄마가 잘 다니던 곳이잖아!”

“그러네…”

“엄마! 저기 마트 보이지!”

“그러네…”

엄마의 눈빛이 서서히 부드러워져 갔다.

“엄마, 그렇지, 정말 가깝지!”

“어머니, 언제든지 부르세요. 달려갈게요!”

“그래, 알았어!”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치 ‘나 여기서 잘 지낼 테니 너희도 안심하고 잘 살아!’라고 우리 부부를 안심시켜 주는 것 같았다.


엄마는 점점 요양원에 잘 적응해 나갔다. 워낙 성격이 활달하고 여장부 스타일이라 더 빨리 적응하는 것 같아 엄마에게 너무 고마웠다. 한동안 나는 매일같이 요양원에 출퇴근을 했다. 엄마가 자식에게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까지...,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엄마를 버린 게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지금부터 내 시간은 없어. 엄마와 입시 생인 딸에게만 시간이 있을 뿐이야!’라고 나를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하루하루 견뎌냈다. 엄마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면서 나는 매일 출퇴근하다시피 한 일을 조금은 줄이기 시작했다. 매일 가던 것을 일주일에 3, 4번 정도 갔고, 남편은 주말을 이용해 엄마를 보러 갔다. 토요일이 되면 한 달에 한두 번 이상은 모시고 나가 외식을 같이 했고, 주일이면 요양원 2층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도 함께 드렸다.

남편과 늘 말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요양원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맞아.”

진짜 그랬다.

엄마는 요양원에 잘 적응해 나갔다.

그래서인지 요양병원에서 심했던 치매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 가끔 본인 팬티를 누가 훔쳐 갔다느니... 자기 밥을 안 주고 자기들끼리만 꾸역꾸역 처먹는다느니..., 이해가지 않는 행동이나 말을 하긴 했지만 의사소통이 전혀 안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또 고민이 생겼다.

“엄마가 저렇게 좋아지시는데, 집으로 모셔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가족과 형제들은 극구 말렸다.

“어머니 스스로 화장실만 다닐 수 있어도 괜찮지만, 당신 혼자 어머니를 모신다는 건 무리야.”

“나도 아닌 것 같아. 네 체력에 엄마 간병하다 네가 먼저 쓰러져, 안돼!”

“집에서 모신들 이보다 낫겠어.”


나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 요양원만큼 엄마한테 잘할 수 있을까?’

또 생각해 보았다.

집에 같이 살 때는 엄마는 엄마 방에, 나는 내 방에서 각각 시간들을 보냈다. 무늬만 한집에 살 뿐이지 사실 엄마랑 오손도손 정겹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요양원에 매일 출퇴근하면서 엄마의 손을 쓰다듬기도 하고, 머리를 빗겨 드리기도 하고, “사랑해!”라는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있는 끈끈한 정은 없다 해도 그래도 엄마가 있는 요양원은 정말 좋은 곳이었다. 어르신들 욕창 때문에 천 기저귀를 사용하고, 콧줄을 끼고 있지 않는 한 평상시에는 휠체어를 태워서라도 마루에서 각 종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벚꽃이 피는 봄에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벚꽃 나들이를 하고, 어버이날에는 잔디 마당에서 서커스 단의 공연을 보고, 생일잔치를 하고, 노래자랑을 하고…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지만 과연 내가 집에서 모신다면 이렇게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게 최선일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나갔다.

‘모시고 와?’

‘아니야!’

‘모시고 와?’

‘아니야!’

하루에도 열두 번 변덕을 부리다가도 별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르륵~ 마음을 접고 접었다.

어떤 것이 최선일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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