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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 Dec 16. 2019

성폭력 사건 해결 요령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쪽은 피해자다. 피해자가 정신적 압박이 심한 상황에 놓이기는 하지만 해결의 열쇠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피해자로서 본의 아니게 해결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사과를 요구하는가 하면, 가해자의 상관에게 이 일을 알리기도 했고, 나중에는 법적인 해결을 위해 경찰을 찾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 일을 개인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나는 피해자로서 가해자의 사과를 받는 일에 1년여를 매달리며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다. 내가 고통 받은 부분을 설명하는가 하면 가해자의 행동에 대한 이유, 이에 대한 설명,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가해자는 블랙아웃을 주장했다. 내가 가해자의 블랙아웃을 믿기까지 두 달, 그리고 내가 가해자에게 가해 사실을 납득시키는 데만 넉 달 이상을 소모했다. 가해자는 당시의 기억이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하며 사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가해자는 끝내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나는 완전히 실패했지만 사과 요구가 쓸모없는 일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피해자가 겪는 괴로움 가운데 하나가 이 일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자책감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이 일이 일어났다는 자책감을 안게 되고 자존감도 떨어진다. 물론 성폭력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초래한다. 피해자가 사건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더라도 자신이 왜 이런 사건을 겪게 되었는지에 대해 혼란을 겪는다. 사과 요구는 피해자가 자신의 감정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지속된 요구에도 가해자가 계속 모호한 태도를 보이자 나는 사건이 있었음을 가해자의 상관에게 따로 알려 사과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지만 가해자는 비슷한 태도를 유지했다. 쏟아지는 이상한 시선을 감당할 각오가 되었다면 공론화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가 피해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오히려 피해자가 눈치 보듯 쏟아지는 시선을 감내해야할 수도 있고 가해자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도 있다. 내 경우는 사건을 아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것 외에는 일이 어떤 방향으로도 진행되지 않았다. 공론화가 효과를 보려면 여론 형성이 가능할 정도의 정서적 공감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게 사실상 불가능한 조직임을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다음으로 가능한 조치는 공식적인 문제 제기다. 내 경우 가해자와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공식적인 채널로 문제 제기를 하는 방법과 조직 외 수사기관에 가해자를 고소하는 방법이 있었다. 본래 이런 일은 비밀 보호가 원칙이지만, 유사한 사건에서 다른 피해자가 조직 내에서 징계를 요구했다가 사건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가 조직의 구석구석에 모두 알려진 데다 가해자가 아닌 조직 내 다른 사람으로부터 문제 제기를 취소할 것을 종용받은 사례가 있었다. 물론 이 사건의 가해자와 내 사건의 가해자는 다른 사람이다. 이 일로도, 그리고 이전부터의 조직 생활 과정에서도 나는 조직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그래서 조직 내 문제 제기를 포기하고 바로 경찰을 찾았다. 이런 사건의 고소기간과 공소시효는 짧으면 6개월 정도인 경우도 있으니 법적 해결을 원한다면 시간을 끌지 않는 것이 좋다. 경찰에 고소하면 바로 조사가 진행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과를 받으려고 시간을 끌다가 고소가 늦어졌는데 가해자는 내가 사건 직후에 고소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내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서면을 제출하기도 했다.

나는 고소 몇 주 후,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았고 조건 없이 고소를 취하했다. 여기까지 보면 이 이야기가 그럭저럭 해피엔딩으로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고소 취하 2주 후, 가해자는 나를 따로 불러 사과한 내용들을 굳이 모두 부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고소를 취하하지 않았다면 사건은 검찰로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법원까지 갈 수도 있다. 고소 이후의 법적 분쟁은 지난한 싸움이다.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치졸하고 치사하며 치밀해진다. 피해자 입장에서 이 단계까지 가서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가해자의 유죄 판결일 것이다.

가해자 입장이라면 피해자에게 진솔한 사과를 할 것을 권하고 싶다. 법적 분쟁을 피하고 싶은 것은 가해자만이 아니다. 피해자 역시 이 일을 경찰에서, 검찰에서, 법정에서 반복해서 진술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사과 받는 것만을 간절히 원했고 이후의 법적 조치 등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사건의 가해자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내가 진솔한 사과를 원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사과를 하고 나면 그 사실이 법적 분쟁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로 유효하게 사용될까봐 걱정했던 것 같다.

가해자가 사용할 수 있는 유효하고도 강력한 카드는 명예훼손이다. 이는 상대의 인격을 손상시킬만한 사실을 유포하면 그 내용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처벌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명예를 훼손했더라도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경우 해당되지 않는다는 면책 조항이 있지만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는 개인에 불과할 가해자의 가해 사실을 알리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과 더불어 가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은 상대의 인격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하는 행위로 여겨져 처벌 대상이 된다. 나 역시 몇몇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므로 충분히 이 요건에 포함이 되었다.

실제로 내 사건의 가해자는 조직 내의 사람들에게, 나와 오해가 있어 내가 자신을 고소했으며 이 상태가 지속되면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맞고소를 하겠다고 했다. 가해자는 내게 직접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가해자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나에게 다시 이 이야기를 전하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상 한 번 공개된 정보는 대부분 공유되고 있었다.

성범죄 피해자 역시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게 반가울 리 만무하다. 물론 내 사건의 가해자는 내가 사건을 몇몇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과 달리 내가 사건의 피해자임을 알리고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부터가 재미있다.

성범죄 피해자A와 가해자B가 있는데, 제3자인 C가 A와 B의 사건을 능력이 닿는 모든 곳에 알리고 다녔다고 해보자. B는 이와 관련해서 C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할 수 있다. 명예훼손은 민형사에 모두 해당되므로 C는 이와 관련해서 검경의 수사를 받는다.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이는 민사 소송에도 영향을 미쳐 C는 A에게 배상금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B는 자신의 피해 사실이 알려졌다는 사실만으로는 C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없다. 범죄의 피해자라는 것은 사고를 당한 것이기에 그의 인격을 폄하한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B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정신적 피해보상이나 손해배상청구 정도다. 이는 모두 민사에 포함되기 때문에 소송을 벌이더라도 C는 B의 소송과 관련해서는 수사기관의 조사 대상이 아니다.

이는 C가 개입하지 않을 경우에도 해당한다. A가 B가 피해자임을 알리는 것은 정신적 피해보상이나 손해배상청구에 해당할 수 있지만 B가 A가 가해자임을 알리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 물론 B는 A에게 정신적 피해보상 등도 요구할 수 있다.

피해자 입장에서 조용히 경찰이나 변호사, 의사에게만 이 일을 알린 게 아니라면 대개는 명예훼손에 해당할 경우가 많다.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면 성범죄 피해자는 사건을 겪고서는 아무 말 없이 경찰서나 병원을 찾아야 한다.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는 과정이 명예훼손과 연관되지 않을만한 판례나 법조문을 찾아보려 했지만 결론은 범죄를 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범죄 사실을 가진 가해자만 명예훼손죄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고죄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허위로 고소한 죄를 말하는데, 이는 성범죄의 고소기간과 공소시효가 짧은 것과 달리 아예 고소기간이 없다고 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즉 사건 이후에라도 언제든지 걸 수 있다. 이는 억울하게 고소당한 경우 외에도 수사기관이 수사력을 낭비시킨 점을 물어 제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미 가해자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지만 법률적으로 언제든지 가해자나 수사기관의 무고 고소가 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다. 물론 무고에 대한 역무고 고소도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내가 그 상황에 놓인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소송이 진행될 경우 가해자가 방어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적지 않다. 게다가 강력하다. 왜 피해자가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겪은 피해 상황에 대해 잘잘못을 따져 묻고 또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은 결국 피해자다. 가해자는 일단 피해자가 소송을 걸면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기 전까지는 피해자가 잘잘못을 따지는 과정에 협조할 수밖에 없다. 과정을 살펴보면 잘못한 사람이 처벌받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오래 버틴 사람이 이기는 구조가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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