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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 Dec 17. 2019

고소 후 다른 기자들의 말

고소 후 출근을 하는데, 그 전까지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지옥처럼 보였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며 사무실 공간이며 업무상 돌아다니는 곳이며, 모든 곳이 다 지옥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 일을 이유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정신이 다른데 가있으면서도 꾸역꾸역 다녔다. 자살충동을 느낀 것도 여러 번이다.

고소가 진행되면서 내게도 설득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T로 하여금 내게 사과하게 해줬던 직원 E는, 너도 다치지만 그 사람의 경력과 가정생활이 다 끝장날 텐데 그 부담을 다 감수할 수 있겠느냐며 취하하라고 했다. D는 모든 고통은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인데 X를 고소한다고 네 마음이 편해지겠냐고 했다.

나는 내가 고소를 했는데도 이 고소 건으로 불안감도 크고 가해자에게 분노감정도 상당히 큰 상태였기 때문에 나를 설득하려는 말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의 나는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이 일에 사로잡혀 있었다. 거의 유일하게 판단할 수 있었던 게 내가 판단불능에 가까운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 기분은 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대부분은 나에게 기름을 부었다.

가해자의 입장을 주장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던 직원들도 고소를 취하하라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혼자 법적 절차를 밟기 시작했기 때문에 내가 받을 스트레스가 너무 크고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기간도 길어질 것이며 X가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내 마음이 풀릴 것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그만두라고 했다. 확실히 나는 이제껏 받아본 적이 없는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조언 이상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사실상 모든 절차를 혼자 진행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함께 일하던 기자 한 명이 소송에 휘말렸다. 해당 기자가 작성한 기사의 사실 내용이 맞지 않으며 악의적으로 기사를 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소송을 당한 기자는 물론 내부에 있던 다른 기자들은 고소 취지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 이런 소송의 경우 보통 기자 외에 언론사가 함께 걸리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방어를 한다. 전담 변호사가 붙고 회사의 기자들이 모두 같은 편이 되어준다. 이 소송에 걸렸던 기자는 나도 고소 진행 중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이유로 나에게 일의 대부분을 넘겼다. 내부 직원과의 소송에 시달리면 스트레스로 인한 괴로움을 말할 수 없다. 말한다고 해도 업무를 회피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회사 밖의 사람과 싸울 때는 입장이 달라진다.

고소 후 X의 상급자인 D를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찾아갔더니 D가 없었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다른 기자와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이 기자는 D, X와 더불어 당시 워크숍 참석자이기도 했다. 가칭 J라 하겠다. 나는 D가 어디 있는지, 언제 올지를 묻고 그에 대한 답만 들을 생각이었다. 다른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야기를 시작하고 불과 몇 분 사이에 나는 사건의 대부분을 J에게 말하고 말았다. 결국 D의 소재는 밝혀내지 못했다. 기자가 무섭다는 생각을 한 것이 두 번인데 이 일이 두 번째였다. 어쨌든 이 이야기가 당시에는 J 선에서 넘어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와중에 X는 담당형사의 전화를 받았고, 고소사실을 통지했더니 담당형사에게 보이스피싱이 아니냐고 했단다. 나중에 상황파악을 하고 나서는 워크숍에 참석했던 직원들을 대부분 만나서 사건에 대해 설명을 했다고 한다. 내가 직원들 몇 명에게 사건에 대해 말한 것은 맞는데 이 내용을 거의 오차 없이 파악한 경위가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고소 이후 X는 사건에 개입된 직원, 내게 사건 이야기를 들은 직원들을 30분에서 한 시간 간격으로 나누어 개별적으로 만났다. X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내가 알게 된 것은 X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도중이었다. 회사 안에서 정보는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

X가 다른 기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말한 내용은, 내가 지난 몇 달간 가해자를 스토킹 했고 워크숍에서의 사건은 내가 있던 방에 들어와서 방이 미끄러워 내게 엎어진 적이 있다는 것이란다. 그리고 내게 무고와 명예훼손을 걸 생각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스토킹의 근거는 내가 만남을 요구했던 내역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과 요구를 하려던 것으로 내용이 다르다. 사건 내용은 여기서 밝히지 않겠지만 이 내용은 아니다. 이 내용이었다면 내가 애써 숨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X의 발언은 나에게 별로 타격이 없었다. 화가 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기록도, 자료도 있었다. 또한 나는 X에게 이 사건과 관련한 모든 이야기를 했고 X는 나에게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X는 증인이 개입된 정황, 그들의 신원, 사건 등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내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무슨 말을 했을지, 내가 가진 정보가 무엇인지 X는 다 알고 있었다. 나는 X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이 블러핑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X도 내가 이 판단을 내릴 것을 모를 리 없었다. X에게 화가 나기는 했지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 거짓말의 마지막으로 X가 어디를 생각하는지 의아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나는 화를 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데, 화를 낸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그만두었다.

나는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일만 하면서 다른 감정을 공연히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X는 D와 G에게 네 명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나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X를 포함해 이들은 모두 언론사 간부였다. 의도는 뻔히 보였지만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그 자리를 거부한다고 해서 나에게 불이익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회사가 들썩거릴 태풍의 눈이었기에 D와 G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은 없었지만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할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들어보고 싶었다.

G에 대해서는 사내에 도는 루머를 들은 적도 있고 동료들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G가 이 일에 개입할 기미를 보이자 G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여기저기 많다며 그럴 여지를 주지 말라고 개인적으로 내게 연락한 사람까지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X가 온 회사에 허위 사실을 퍼뜨린 것 이상의 대형 이벤트가 설마 있으랴 하면서 마음을 놓은 탓이다. D는 업무적으로나 사람으로서나 내가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X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서 X를 제외한 두 명만 보겠다고 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예상을 벗어나는 좋은 해결 방안을 기대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지만 D와 G의 이야기는 예상을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D는 내가 고소하면 가해자가 많이 다칠 텐데 꼭 그래야겠냐, 네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차 힘들어 보이는데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에게도 내 입장은 없었고 가해자의 입장만 있었다. 그러자 화를 참지 못하고 그들을 몰아붙였다. 내가 피해자고 원인제공은 가해자가 한 것인데, 왜 고소와 피해·가해 상황을 분리시켜 생각하는지 되물었다. X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고소하지 않았을 텐데 왜 그 둘을 따로 떼어서 내가 X를 파멸시키려는 사람으로 몰고 가냐고, 내가 그때 겪은 일과 지금까지 겪는 정신적 피해는 뭐냐고, 이런 이야기는 내가 아니라 X에게 가서 하라고 했다. 얼마 후 나는 G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조언을 부탁했더니 입장 정리를 잘했던데 뭘 묻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X는 내가 만나기를 거부했고 다른 두 사람의 설득도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다음날 경찰조사를 받으러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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