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도 Dec 18. 2019

성폭력 사건 고소의 취소

그리고 1주일 정도가 지나서 회사의 내 자리로 전화가 왔다. 누군가의 업무상 연락인 줄 알고 받았는데 뜻밖에도 X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받지 않았겠지만 이미 받은 전화의 상대가 X라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회사 앞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일이 끝나면 오라고 내게 말했다.

갔더니 X는 사과를 했다. 약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기자가 되었는데 나를 다치게 하고 힘들게 했다니 미안하다고 말했다. 조건부 사과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게 진솔한 사과라고 생각해야할지는 잘 모르겠다. 몇 달을 기다렸던 사과였는데 이제야 조금이나마 비슷한 것을 받았다. X는 이미 이 일이 회사에 다 퍼졌고, 이 일이 더 커지면 당시 워크숍 참여자들이 다 경찰조사를 받거나 회사에서 징계를 받는 식으로 말려들게 되니 그런 일은 막아야하지 않겠냐며 법적인 문제는 배제하고 둘이서 해결하자고 했다. X는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자기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도 했다. X가 사람들을 불러 말했다는 내용에 대해 물었다. 내가 스토킹을 했다는 설은 E의 조언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또한 조사는 받았지만 제출할 자료는 있다고만 하고 제출하지 않았다고 했다. 수사를 지연시키려는 의도인 것처럼 말했지만 나로서는 X가 제출한 자료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그간 너무 힘들었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X를 앞에 두고 4시간을 펑펑 울었다. 이 문제에서 믿고 의지할 곳이 전혀 없다보니 감정을 참고 참다가 이 일을 만든 가해자 X 앞에서 부서져 내렸다. 고소 이후로 이 일이 어떻게 번질지 몰라 너무 힘들었고 사과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사실 고소 진행이 괴로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소 취하에 대해서는 일단 맑은 정신에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오후에 X로부터 차를 한잔 마시자고 연락이 왔다. 전날 X가 사과했다는 사실 외에 내가 지난 약 1년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두 기억해냈다. 이제 와서 이렇게 간단히 풀릴 마음이었을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일단 하루나 이틀 생각할 시간을 더 달라고 했는데, X는 곧 참고인 조사가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고 마음이 다친 것은 말로 뱉어내서 풀어야하고 자기가 도와줄 테니 고소는 취하해달라고 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가해자에게 전화가 와서 어제 그제 이야기가 잘 풀렸고 자신이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 지금 고소를 취하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알았다고 했다. 내가 사과를 요청하기 위해 몇 달간 서너 번 연락했던 일이 스토킹이라면 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날마다 연락하는 것은 스토킹의 범주에서 얼마나 벗어나는 것일까.

우선 담당형사를 만나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담당형사가 경찰서에서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가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연락을 했더니 그럼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고소를 취하할 수 없었냐고 했다. 내일 처리하거나 하겠다고 했더니, 회사에서 이미 이 일이 점점 윗선으로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라 이 일이 더 진행되면 나나 X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X는 마치 나에게 고소 취하를 맡겨놓은 것 같았다. 나라고 고소 진행이나 경찰서를 찾는 상황이 편하고 즐거웠겠나. 고소 결정은 어려웠다. 그 결정으로 인해 나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 괴로웠던 기억을 모두 뒤로 하고 고소를 취소하는 것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결정이었다.

그 다음날이 되어 약속을 하고 담당형사를 만났다. 일단 가해자가 제출할 지료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아직 참고인조사는 진행할 예정은 없다고 했다. 담당형사 말로는, 가해자가 양아치는 아니지 않냐며 여기 드나드는 사람 대부분이 전과10범 이상이고 별 스트레스나 죄책감이 없는데 가해자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 않냐고 했다. 경찰들도 민원이 들어오면 조사를 받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하는지 다 아는데도 그 상황이 힘든데 X가 처음 조사받는 것만으로도 많이 혼이 난 것이라고 했다. 나는 피해자 입장으로 비교적 친절한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는데도 고생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납득이 갔다.

어쨌든 참고인들 이야기도 들어봐야 되고 무혐의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원하면 거짓말탐지기를 쓸 수도 있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고나 명예훼손을 걸겠다는 말을 들은 마당이라 취하할 경우에 내 손에는 아무런 카드가 남지 않은 상태에서 보복이 걱정된다고 했더니, 무고를 걸면 반대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하는데 사건이 있었음을 입증하기도 쉽지 않지만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도 경찰 입장에서 쉽지 않아서 그런 식으로는 못할 것이고 명예훼손도 걸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담당형사가 연락해서 그러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겠다고 했다.

고소 이후 나는 죽을 만큼 힘들었고 가해자의 사과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이 일을 더 끌어갈 힘이 더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조사받는 것만으로도 많이 혼난 것이라는 담당형사의 말도 설득력 있게 작용해서 조건 없이 고소를 취하했다. 사람들로부터 합의서나 합의금을 요구하라는 조언도 받았지만 그냥 내 마음이 풀리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구두약속을, 사람을 한 번 더 믿어보고 싶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