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ldred Oct 17. 2019

논현동에서 뜨개질을 하는 이유

"천천히 해. 빨리 할 필요도 없어."



15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잡은 바늘이 낯설고 불편했다. 워낙 손재주가 없는 탓에 모양이 예쁘게 나오지 않을까 시작부터 두려웠다. 아빠에게 유일하게 물려받지 못한 게 손재주였다. 테이블 하나도 뚝딱 만들어내는 아빠와는 달리, 고등학교 가정 시간에 누구나 쉽게 하는 버선 조차도 앞코를 뻥 뚫었던 나였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퇴근하기 몇 시간 전, 우리 팀 아트가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노라며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아, 올 게 왔구나. 작년부터 여기저기서 오퍼를 받고 있고 흔들리고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던 아이였다. 그럴 수 있는 연차였고,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올 초 3개월 휴직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것도 아니고, 더 큰 회사로 가서 능력을 펼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 잘 보내주자고도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니 착잡했다. 사람 또 어디서 구하지?


새로 가는 회사의 CD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연봉을 맞춰줬다고 했다. 게다가 올해 촬영을 몇 건이나 했냐 물으며 내 밑에 2~3년 있으면 그보다 더 많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줄 테니 자기만 믿으라고 했단다. 이 아이는 도대체 나한테 그런 얘기까지 굳이 왜 한 걸까. 나중에서야 아차 싶었는지 말실수한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가을바람에 채 씻기지도 않을 마음을 들고 퇴근하는 길, 뭘로 마음을 달랠까 고민하고 있는데 S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도 뜨개질하러 같이 안 가실래요?"


S는 요즘 쁘띠 목도리를 만들고 있었다. 같은 걸로 할까 하다가 목도리는 평소에 하지 않으니까 담요를 만들어보겠노라 했다. 망고 실과 대바늘로 하는 거니까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빨간색 실을 고르고 선생님이 만들어준 서른네 개의 코를 끼웠다 실을 돌렸다를 반복했다. 역시 생각을 없애주는 데는 단순 노동이 정답이었다.


처음엔 논현동에, 술집과 음식점이 즐비한 영동시장 근처에 뜨개질 집인가 싶었다. 어울리지 않는 위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을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친구도 여기 자주 왔었어. 소식 듣고 나서 처음엔 안 믿었다니까? 나라도 연락 자주 할 걸, 얘기 좀 더 들어줄 걸 하는 생각 들더라고."


선생님은 최근에 있었던 안타까운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쩐지 미안해하셨다. 그래, 누군가에게는 시끌벅적한 세상과는 달리 조용하게 숨 쉴만한 작은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뜨개질 집이었을 것이고.


내 삶이 뜨개질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만들어 놓은 가이드를 따라 오랜 시간 반복하기만 하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삶, 빨리 서두르거나 경쟁하지 않아도 꾸준히 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끝에 도달하고, 행여나 중간에 실수를 하더라도 고칠 방법이 있는 그런 삶 말이다.


다음번엔 코스터를 만들까, 과감하게 옷을 만들까. 뜨개질을 하는 동안에 하는 고민이라고는 겨우 이게 다라니. 지금 내가 가진 고민의 크기도 이 정도면 좋으련만. 정신없이 하다 보니 어느새 덩어리를 썼다. 이제 번째 실을 이을 차례다.


일단 해보자. 계속하다 보면 또 다른 결과가 있겠지.

 


이전 08화 팀장은 처음이라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