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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red Aug 16. 2019

팀장은 처음이라서

"물어보기 전에 니가 먼저 알려줬을 수도 있지."


H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배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었다. 혼자 끙끙대지 말고 알아서 판단하지 말고 선배에게 먼저 물어보라고, 부사수의 역할은 사수를 괴롭히는 거라고. 10년을 넘게 후배들에게 이야기해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를 괴롭히고, 선배를 괴롭히는 후배는 10명 중 1명이 될까 말까였다. 나중에 왜 물어보지 않느냐고 되물어보면, 선배가 바쁜 것 같아서 또는 귀찮아할 것 같아서 그랬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끔은 자신이 모르는지 몰라서 물어봤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 그럴 있지. 그래도 물어봐야지! 가 지금까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H의 말에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과연 나는 그동안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었을까. 어쩌면 다가오지 못하게 이상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거나 둘째가라면 서러운 급한 성격 때문에 후배들이 질문한 틈도 없이 일을 진행해버린 건 아닐까.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합리화했다. 지금 우리 본부 특성상 나보다 한참 어린 후배들이 많다 보니 '보호자'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는 내가 다섯 아이들의'엄마'가 된 것이다. 이건 이렇게 하는 거고 저건 저렇게 하는 거라고 세상 친절하게 알려줬다. 아이가 엄마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모방하듯이, 내가 먼저 나서서 해주면 그들도 알아서 따라오고 성장해나갈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인생이 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듯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분리불안 증세를 앓는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했다.


몇 년 전, 어떤 씨디가 그런 말을 했다. "카피님, 카피님 바로 밑에 있는 후배가 잘해야 카피님이 편해져요. 잘해주려고 하지 말고 가르치세요. 나도 처음엔 맥에서 떼는 쉽지 않았어요. 내가 하면 빠르거든. 근데 그러면 안돼요. 후배들한테 자꾸 시키고 우리는 봐야 돼요." 그때만 해도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이런 상황이 닥쳐올 줄도 모르고.


기다리는 시간은 늘 고됐다. 답답했다. 때로는 후배들에게 정리해보라고 시켜놓고는 혼자 몰래 정리하고 있던 적도 있었다.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후배들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일을 대충 해도, 엉망으로 해도 자신들의 뒤에는 언제나 내가 버티고 있다는 걸, 그래서 자신들은 다치지 않을 거라는 걸.


그게 맞다. 선배는 후배에게 그런 존재여야 한다. 그건 변함없다.


하지만 내가 너무 울타리 안에 그들을 가둬놓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생각보다 더 잘 해낼 수도 있는데, 의외로 숨겨진 능력이 있을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지레 겁먹고 모든 걸 해결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잘못이다.


10년만 하고 그만두자던 내가, 씨디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과 몇 년 전까지 이야기하던 내가, 덜컥 씨디가 되고 팀장이 돼서 겪는 과도기쯤으로 생각하고 싶다. 나 역시 한참을 따르던 S 씨디님의 그늘을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는 과정으로, 안 그래도 분히 크지만 좀 더 크는 과정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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